[기획취재]생활주변 업소들 'IMF'에 휘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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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서울 구로6동 현대아파트 상가에서 비디오대여점을 운영하는 황명주 (36) 씨는 지난해 말 국제통화기금 (IMF) 한파가 불어 닥치자 주변의 다른 점포들과 달리 내심 장사가 더 잘될 것으로 기대했다.

주민들이 문화생활비를 줄이기 위해 영화.연극관람 대신 집에서 비디오를 많이 빌려 볼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곧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IMF직후 잠시 늘었던 매출이 최근 다시 급격히 감소하고 있는 것이다.

"대여료를 개당 5백원에서 3백원으로 낮췄는데도 매출은 지난해 10월에 비해 30% 이상 줄었어요. 경기가 워낙 죽어 이젠 싸구려 장사도 안되는 것 같아요" 라며 黃씨는 한숨을 내쉬었다.

IMF한파 이후 소득이 대폭 줄어든 가계들이 마른 수건도 다시 짜는 내핍생활을 본격화하면서 식당.옷가게.금은방.호프집.세탁소.카센터.약국.꽃가게.택시운전기사 등 생활 주변형 업소.업종들이 극심한 불황을 견디지 못하고 줄줄이 무너지고 있다.

본지 기획취재팀은 IMF체제 출범 6개월여가 지난 요즘 거리 (路邊) 경제 주체들의 체감 경기를 살펴보기 위해 지난달 20일부터 보름 동안 명동상가 등 서울시내 6개 지역 대로변의 1백 개 점포 및 노점상 등을 대상으로 IMF이전과 요즘의 영업실태를 조사했다.

◇ 거리경기 지표는 IMF전보다 평균 50% 이하로 떨어졌다 = 1백개 업소 가운데 59개 업소의 매출이 IMF이전의 50%로 줄었다.

주로 중고가 대중음식점.중저가 옷가게.빵집.호프집.여관.약국.택시운전기사.구두닦이 등이 여기에 속했다.

심지어 70~80% 줄어든 업소도 10개에 달했다.

꽃가게.금은방.다방.카센터.세탁소 등 문화.여유생활 업종들이 많았다.

비교적 매출이 덜 줄어든 업종 (30~40% 감소) 은 가정식 백반집.국산 신발가게.잡화행상 등 저가 제품판매 업소들이었다.

다만 한 그릇에 3천원 이하의 음식을 파는 저가 음식점과 켤레당 1만원대 미만의 신발을 파는 가게 가운데는 매출이 늘어난 곳도 있었다.

한국화원통신배달협회에 따르면 서울시내 꽃가게는 지난해 말 4백52개에서 6월말 현재 3백70개로 18%가 줄었다.

카센터.금은방.다방.단란주점 등의 숫자도 2~5%씩 줄었다.

자동차 경정비협회 이주희 국장은 "장사를 계속하고 있는 카센터 중에서도 개점휴업 상태인 업소들이 절반 가량에 이른다" 고 밝혔다.

◇ 거리경제의 도미노식 붕괴 현상이 일고 있다 = 고급업소의 뒤를 이어 중저가 품목 취급업소→서민형 영세점포까지 줄줄이 쓰러지는 도미노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IMF직후 단란주점.룸살롱.일식집.외제 브랜드 취급점 등 고급 업소들에 비해 상대적인 영업 호조를 보였던 노래방.호프집.비디오대여점 등도 최근 영업이 급격히 위축되고 있다.

올들어 실업자 증가로 유동인구가 10%가량 늘어난 북한산등산로 주변만 해도 27개 요식업소들 (북한산국립공원 음식점협회) 의 매출이 지난해 말에 비해 평균 50% 이상 줄었다.

이제는 노점상들의 매출도 절반 이하로 내려앉고 있는 실정이다.

◇ 내수경기 진작책이 절실하다 = 벼랑끝에 몰린 업소들은 가격인하.종업원 감축 및 가족동원 등 다양한 자구책을 동원하고 있지만 영업상태는 악화일로에 있다.

고려대 경영학과 김재욱 교수는 "거리경제의 붕괴는 제조업 존립기반을 무너뜨릴 수 있는 매우 위험한 현상" 이라고 지적하며 "이들에 대해 한시적인 세금혜택을 주는 등 강도 높은 경기 진작책이 절실하다" 고 말했다.

중앙일보 기획취재팀 곽재원.임봉수.김남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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