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만 가면 왜 엉망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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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신불수 상태에 빠진 한국 의회민주주의의 실상이 또 한번 드러났다. 비정규직법을 이대로 놔두면 수십만 명의 비정규직 근로자가 해고 위험에 노출된다는 것은 뻔한 사실이었다. 여야는 그러나 몇 달 동안 말싸움만 벌이다가 결국 시한(6월 30일) 내에 개정안을 마련하는 데 실패했다. 의회민주주의가 다수결을 기본 원리로 작동하는 선진국에선 이런 일을 찾기 어렵다. 여야가 토론을 벌여 국민에게 각자의 입장을 충분히 알린 뒤 표결 결과에 승복하는 정치 문화가 정착됐기 때문이다. 표결에 이긴 다수당은 당연히 정책 실패에 따른 정치적 책임까지 지는 것이고, 소수당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꾸준히 홍보해 다수당의 지위를 노린다. 누가 옳았느냐는 궁극적 심판은 차기 선거에서 유권자가 내린다.

하지만 우리 국회에서 의석이란 숫자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이나 비정규직법안처럼 여야가 첨예하게 맞붙은 법안은 169석의 한나라당이나 84석의 민주당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야당이 저지대상을 ‘악법’으로 규정하고 육탄 저지를 선언하는 순간 국회는 물리력을 기본 원리로 하는 격투기장으로 전락한다. 다수당인 한나라당의 이점이라곤 자당 출신인 국회의장이 야당 반발을 무릅쓰고 직권상정을 해 줄지 모른다는 처연한 기대뿐이다.

과거 여야가 뒤바뀐 시절에도 국회의 행태는 똑같았다. 2004년 국가보안법 개정 공방 때 집권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이 수적 우세를 바탕으로 한나라당을 압박하자 한나라당은 법사위 회의장 점거로 맞섰다.

정치컨설턴트 김윤재 변호사는 1일 “과거 권위주의 정부 시절엔 야당이 물리력을 동원해 투쟁을 벌이는 것이 국민으로부터 호응을 얻었던 게 사실”이라면서도 “절차적 민주주의가 확립되는 시기로 넘어오면서 그런 고리는 끊어졌어야 했다”고 진단했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정책적 이슈를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재단하는 것도 권위주의 시대가 남긴 후유증이다. 숭실대 강원택(정치학) 교수는 “비정규직법은 많은 사람의 삶이 걸려 있는 민생법안인데 여야가 과도하게 정치적 속성을 부여하다 보니 해결이 더욱 어렵게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현실을 제도적으로 개선하자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명지대 김형준(정치학) 교수는 “원내 교섭단체 대표들이 합의하지 않으면 국회 일정이 마비되는 현행 국회법은 국회 갈등구조를 오히려 증폭시키고 있어 손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경희대 김민전(정치학) 교수는 “공천 민주화를 통해 의원들의 자율성을 키워주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정하·백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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