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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산책] LPGA 신인왕 1순위 안시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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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 안시현이 에비앙 골프장 앞에서 익살스러운 표정를 지었다.

"미국에 와서 많은 걸 배웠어요. 앞으로 배울 것도 많고요. 그런데 가끔씩은 너무 힘들어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아요. 말(영어) 못하는 것도 힘들고…."

지난해 11월 제주도에서 열린 미국여자프로골프협회(LPGA)투어 나인브릿지 클래식에서 깜짝 우승을 하며 신데렐라로 뜬 안시현(20.엘로드).

미국으로 건너간 6개월은 일단 성공적이다. 13차례 출전에 톱10에만 네 번 들었다. 개막전인 웰치스 프라이스 챔피언십(3월)에서 공동 5위에 올랐고, 두 번째 메이저 대회인 맥도널드 LPGA챔피언십(6월)에선 준우승을 했다. 올 시즌 가장 유력한 신인왕 후보다.

맑은 미소에 분홍빛 의상 코디로 얻은 '핑크 레이디'라는 별칭에는 어린 안시현에 대한 미국팬들의 애정이 담겨 있다.

하지만 그 미소 뒤엔 고독도 있다."그토록 LPGA 투어에 오고 싶었는데 막상 와보니 호텔을 전전하는 떠돌이 생활이 쉽지만은 않네요. 체력의 한계를 느끼는 게 사실이고….성적이 저조할 때 좌절감은 표현하기 어려워요."

에비앙 마스터스에서의 부진 탓일까. 22일 파리 에비앙에서 만난 안시현은 이따금씩 힘든 표정을 지었다.

안시현이 골프채를 처음 쥔 건 인천 연화초등학교 4학년 때다. 아버지(안원균.45)를 따라 골프 연습장에 갔다가 입문했다. "아빠의 공 치는 폼이 되게 웃기더라고요. 그래서 '나라면 저렇게는 안 치겠다'는 생각에 골프채를 잡았지요."

어린 시절 안시현의 가정은 유복했다. 그러나 1999년 아버지의 공장에 불이 나 급격히 가세가 기울면서 골프를 중단할 위기를 맞는다. 이때 안시현의 재능을 눈여겨보고 데려다 키운 사람이 정해심(45)코치다.

정 코치의 스파르타식 조련을 받으며 안시현은 유망주로 떠올랐다. 동갑내기 라이벌인 김주미와 정 코치의 집에서 한솥밥을 먹으며 거의 매일 맞대결을 벌였다. 지는 사람은 남아서 훈련을 계속해야 했기 때문에 죽기살기로 공을 쳤다.

98년 국가대표 상비군에 뽑히면서 김주미.임성아와 함께 트로이카 시대를 만든다. 지난해 나인브릿지 클래식은 그를 위한 무대였다. 1라운드부터 선두에 나서 아니카 소렌스탐.박세리 등 강자들을 모두 따돌렸다.

"우승하리라곤 꿈도 못 꿨지요. 어떻게 공을 쳤는지 기억도 잘 안나요."

그는 지난 5월 정해심 코치와 결별했다. "그 뒤에 부모님이 미국에 오셨어요. 부모님 고생도 말이 아니지요. 저는 엄마가 해주는 김치랑 멸치볶음을 먹으며 힘을 내고 있어요."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 안시현은 한국 식당이 있는 곳에서 대회가 열리면 꼭 찾아가 떡볶이나 오징어 볶음 같은 걸 먹는다.

영어는 그리 많이 늘지 않았다고 했다. 캐디(브라이언 딜리)와 간단한 의사 소통을 하는 건 문제가 없지만 영어 인터뷰는 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앞으로는 용기를 내서 해볼 생각이다.

"(박)지은 언니가 그러데요. 뭐라고 묻건 내가 하고 싶은 말만 또박또박 하라고요. 그래서 앞으로는 그럴까 해요."

박지은은 안시현에게 큰 위안처다. "성격이 잘 맞아요. 지은이 언니가 잘 챙겨줘서 어려움을 덜 수 있었어요."

외국선수들과도 친할까. 줄리 잉크스터.메그 맬런.베스 대니얼(이상 미국).소렌스탐(스웨덴) 등과는 서로 안부를 묻는 사이다. 그 중 40대의 잉크스터를 가장 좋아한다. 선수생활을 하면서도 화목한 가정을 꾸미는 점이 좋다고 했다.

"지난 4월 칙필A 대회에서 잉크스터와 함께 라운드하게 돼 너무 기뻤어요. 뭐라고 말할까 고민했더니 지은이 언니가 '솔직하게 좋아한다'고 말하래요. 그래서 1번 홀 티샷을 하고난 뒤 페어웨이를 걸어가다가 '아이 라이크 유'라고 했지요. 그 후론 잉크스터가 아주 잘해줘요. 일부러 말도 천천히 해주고요."

최근엔 '애니(Annie)'란 영어 이름도 생겼다. 맬런과 대니얼이 US여자오픈 도중 저녁을 먹다가 '시현'이라는 이름이 발음하기 어렵다며 지어줬다. 소렌스탐은 "내가 사는 동네에 집을 얻어라"고 하는 등 살갑게 대해준다.

"(미국 무대에서) 우승은 급할 건 없다고 생각해요. 쉽게 우승해 자만하기보다는 산전수전 다 겪은 뒤에 하는 게 더 보람을 느낄 것 같아요."

안시현은 여가 시간엔 인터넷 메신저로 한국의 친구들과 수다를 떨거나 비디오를 빌려다 한국 드라마를 본다. 최근엔 '파리의 연인'을 무척 재미있게 봤다고 했다.

에비앙=정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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