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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아라리난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9면

제4장 서까래를 치면 기둥이 운다

변씨의 이죽거림에 자극을 받은 태호는 페달을 더욱 깊게 밟았다.

자동차는 언덕길을 찢어지는 소리를 토하면서 기세 좋게 달리고 있었다.

그는 후사경에 비치는 철규의 안색을 힐끗 곁눈질하였다.

예상했던 대로 안색이 하얗게 질리면서 얼른 앞에 있는 손잡이를 낚아챘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 행중에서 떠나기를 주저하고 있는데. 한선배 때문인 줄 알고 있겠지? 천만에 말씀이야.

하긴 얼마전까지는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 그런데 지금은 아냐. 나 대신 쇠파이프 휘둘러주고 나 대신해서 내출혈이 되고 갈비뼈가 거덜나도록 맞아준 봉환이형 때문이란 말야. 사람이 봉환이형처럼 의리있고, 의협심이 있어야지. 그러면 못써. 그러나 모든 것이 봉환이형 때문이라고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지. 아무래도 정신적인 위안이랄까. 뭐 그런 것은 한선배한테 영향을 받고 있다고 봐야겠지.

그렇기 때문에 지난밤을 거의 뜬눈으로 하얗게 지새우고 말았다는 거 한선배는 알어? 한선배와 내가 동성연애 사이는 아니지만, 이상하게 한선배가 곁에 없으면 허전하고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단 말야. 대선배나 봉환이형에게는 그런 느낌이 없는데, 한선배에게만 그런 느낌을 가지는 이유를 나도 잘 모르겠어. 지난밤에 선배에게 뭔가 시간을 제공해야 되겠다는 심정에서 대선배를 곁부축하고 자리를 비켜준 것은 사실이야.

하지만 적당히 재미봤으면, 여인숙으로 돌아왔어야 맛이지. 밤새껏 방문도 걸지 않고 좁은 뜨락으로 드나드는 발걸음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며 시계만 봤잖아. 대선배의 지겨운 기침소리를 밤새 듣고 있어야 했던 내 고충을 헤아려나 봤겠어? 그 여자한테 별다른 반감 같은 건 없어. 겉보기에는 닳고닳은 서울여자가 틀림없어 보이는데, 어젯밤에 술자리 수발을 기꺼이 자청하고 대선배가 그토록 심하게 쥐어박곤 하는데도 시종일관 흐트러짐이 없이 예의를 지키는 태도 따위는 본받을 만했어.

어쩌면 승희씨보다 어느 면에선 한 수 위의 여자라는 생각도 들었어. 하지만 한선배는 장돌뱅이 아냐. 선배는 그걸 항상 의식하고 있어야 돼. 그 여자가 지금 바닥에서 기고 있는 선배의 뭘 보고 접근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커피 한 잔 대접했다고 너무나 손쉽게 잠자리까지 같이하자고 유혹한다는 게 뭔가 꺼림칙하다는 생각 안 들어? 신분도 모르는 여자하고 섹스 하는 걸 버릇처럼 일삼다가 에이즈라도 걸리면 어떻게 할래? 섹스 하다가 에이즈 걸리면, 그것부터 먼저 썩는다는 말 어디서 주워들은 것 같은데?

"태호 차 좀 세워. " 귓결에 그런 말이 다급하게 들려온 것 같았다.

혼자 생각에 잠겨 있었던 태호는 그 말의 진원지를 찾아 두 사람의 기색을 살폈다.

헛구역질을 하던 변씨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는 급브레이크를 밟았고, 제동이 걸린 자동차는 빠그라지는 소리를 내쏟으며 한길가에 삐딱하게 정거했다.

차가 정거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변씨는 총알처럼 조수석에서 튀어나갔다.

그리고 두 발짝도 채 떼어놓기 전에 변씨의 입에선 누런 무엇이 포물선을 그리며 야단스럽게 쏟아졌다.

변씨는 그 자리에 허리를 꼬고 주저앉았다.

그제서야 철규가 얼른 차를 내려 변씨의 등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변씨는 그 와중에서도 철규의 손을 잽싸게 뿌리쳤다.

열적은 모습으로 서 있는 철규를 뒤따라 태호가 내려가서 변씨를 부축하였다.

변씨는 얼른 회복되지 않았다.

간발의 차이를 두고 가릉가릉하다가 또 다시 토사물을 질펀하게 내쏟았다.

철규는 자동차와 헛구역질을 하고 있는 변씨의 사이에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태호조차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매정하게 그의 손길을 뿌리친 변씨에게 태호는 소곤거리는 말투로 위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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