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문화유산 답사기]26.덕흥리로 가는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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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드디어 답사 마지막 날이다. 나로서는 길고 긴 열이틀이었다.

인간사 모든 일에 마지막이 되면 별스러운 감정이 일어나는 줄은 잘 알고 있지만 내일이면 평양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그럴 나이가 아닌데도 자꾸 가슴이 저려온다.

내가 묵고 있던 숙소 앞에는 키 큰 미루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그 생김생김이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교정에 있던 것과 너무도 비슷해 각별히 정이 들었다.

처음 평양에 왔을 때만 해도 단풍 들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는데 어느덧 잎사귀는 노랗게 물들고 여린 바람에도 하나씩 둘씩 낙엽을 떨군다.

오늘은 답사일정이 덕흥리 벽화무덤과 강서 큰무덤으로 잡혀 있다.

언제나 그랬듯이 나는 미루나무 아래서 출발을 기다리고 있는데 북측 안내단장인 용강선생이 여느 때보다 밝은 얼굴을 하고서 인사를 건넨다.

"오늘은 교수선생 소원 푸는 날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방북 일정을 짤 때 나는 모든 것을 북측 사정에 일임하겠지만 덕흥리 벽화무덤과 강서 큰무덤 둘 중 하나만이라도 꼭 내부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는 나의 소망이자 모든 한국 미술사가의 꿈같은 희망이기도 한 것이다.

북측은 나의 이 간절함 때문에 무척 고심했던 것을 이날 알게 됐다.

"방북 답사단의 요구서를 받고 내가 얼마나 애썼는가는 저 리정남 연구사가 잘 알고 있지만 우리는 이 사업을 최선 최대로 보장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지령을 주었습니다. 열라! 그런데 담당자가 이것은 신중한 문제라며 안된다는 겁니다.

그래서…방향적으로만 말하겠습니다. 결국 역사유적 보존 책임일꾼을 만나 이것은 '소리없는' 역사적 사업이라고 했는데도 책임일꾼 하는 말이 7, 8월은 장마철이라 누가 열라고 해도 열지 못한다는 겁니다.

역사적 사업은 한차례 일이지만 역사유적 보존은 영구적인 일이기 때문에 안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나오는데 낸들 어떡하겠습니까. 다만 말이나 해둘 값으로 10월에 오면 열어준다는 보장을 받아왔죠. 그런데 오늘이 며칠입니까? 10월3일 아닙니까!"

사실 우리의 첫 방북일정은 지난해 7월18일로 잡혀 있었고 북측은 거기에 맞춰 모든 준비를 다했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두 달 뒤에야 성사를 이루게 됐다. 그런데 그게 전화위복이 돼 하나도 아니고 둘 다 내부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난 용강선생이 무용담을 늘어놓듯 열심히 설명하는 것을 들으면서 그 역사유적 보존 책임일꾼의 의연했던 모습을 생각하면서 오히려 그분께 감사하는 마음이 일어 먼데 하늘을 망연히 올려다보고 잠시 할 말을 잊었다.

그러자 용강선생은 자신에게 감격한 줄로 알고 내 어깨를 잡으면 한마디 한다.

"아, 교수선생. 그만한 일에 뭐 그리 감사할 것 있소. 시간과 품이 좀 들었을 뿐이지. 자 갑시다." 서재동 초대소 정문을 나와 지하철 보통강역을 지난 우리의 버스가 여느 때와는 달리 오른쪽으로 꺾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여태껏 나는 평양의 동남쪽과 북쪽을 주로 답사했고 서쪽은 처음이었다.

평양의 서쪽은 대단한 들판이었다. 시내를 벗어나자마자 드넓은 평원이 일망무제로 펼쳐지고 고개 숙인 벼이삭이 바람결에 흩날리며 만경창파를 이룬다.

넓은 들판을 감싼 산자락은 저 멀리 아득한 곳에서 낮은 포복으로 납작하게 엎드려 있고 우리는 거기를 향해 곧장 질러갔다.

지도를 꺼내 살펴보니 이 들판은 강서.용강.남포로 연결돼 있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언제나 그랬듯이 리정남선생에게 물었다.

"덕흥리무덤과 강서 큰무덤은 멀리 떨어져 있나요?" "아니오. 구역이 다르다 뿐이지 차로 10분 안짝에 있습니다. " "그러면 약수리무덤.수산리무덤은 어딘가요?" "그것도 다 거기가 거깁니다. 그뿐인가요. 태성리 벽화무덤.대안리 벽화무덤도 여기에 있죠. 또 거기서 용강군으로 넘어가면 용강큰무덤.쌍기둥무덤이 있고 용강에서 대동강을 건너가면 안악벽화무덤들이 있으니 크게 봐선 강서.용강.안악이 강서지역 벽화무덤떼라고 해도 되죠. "

이것은 참으로 우스운 일이었다. 지도를 보아도 그렇고, 책을 보아도 그렇다고 자세히 나와 있는 사항들인데 지도와 책을 볼 때는 건성으로 지나가고 답사와서야 그것을 실감하다니….

이제 내 머리 속을 정리해 말하자면 현재까지 발견된 80여기의 고구려 벽화무덤은 크게 두 지역으로 나뉜다.

퉁구 (通溝) 지역에 20여기, 평양지역에 60여기 있는데, 평양지역 벽화무덤 중 40여기가 강서구역이라는 이 지역에 집중해 있으니 나는 지금 명실공히 고구려 고분벽화의 고향에 찾아온 것이다.

그러는 사이 덕흥리에 가까워져 오니 갑자기 구릉에 구릉이 겹쳐 그것을 넘고 돌아가느라고 버스가 몹시 흔들린다.

그것이 괜스레 미안스러웠던지 리선생이 웃으며 한마디한다.

"학이 춤추느라고 이런답니다. " "학이 춤추다뇨?" "이 산이 무학산 (舞鶴山) 이랍니다. 강서의 벽화무덤들은 모두 이 무학산을 끼거나, 무학산을 바라보고 늘어서 있답니다."

이윽고 덕흥리 벽화무덤에 도착해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돌계단을 올라 무덤 입구로 향하니 우람한 무학산을 등지고 옥녀봉 남쪽자락 솔밭 속에 반듯하게 누워 있는 무덤의 모습이 마냥 평화로워 보인다.

전에 주영헌선생이 여기 와서 보고 딱 무덤이 있을 자리였다고 했던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무덤 입구에 당도하자 고분관리소의 관리원 김도수 (金道洙.63).윤철 (尹哲.36) , 그리고 연구조사원 김철 (金哲.39) 세 분이 무덤의 철문을 열고 있었다. 시건장치는 생각보다 튼실했고 여러 겹으로 돼 있었다.

그런데 이것은 예고편에 지나지 않았다. 두겹 철문을 열고 들어서면 무덤 내부로 들어가는 길은 곧장 뚫린 것이 아니라 지하 1층으로 내려가 복도를 거쳐 다시 지상으로 올라가도록 길고 깊게 우회로를 내놓았다.

그러고 나서 다시 두겹 철문과 유리문을 열어야 비로소 무덤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돼 있다.

모든 게 직사광선을 피하고 항온항습을 유지하기 위한 치밀한 조치였다.

순간 나는 고마운 마음과 부끄러운 마음이 동시에 일어났다.

나는 이렇게 정성스레 보존하고 있는 곳을 내 욕심만 앞세워 들어간다는 것이 마냥 미안스럽기만 했다. 이런 줄도 모르고 장마철에 오면서 문을 열어달라고 요구했던 나의 무지와 오만이 부끄러웠던 것이다.

이런 생각에 걸음을 주춤거리는데 관리원아바이가 손전등을 비치면서 어서 들어오라고 손짓한다. 나는 고개를 바짝 숙이고 무덤 안으로 들어갔다.

글 = 유홍준 (영남대교수.박물관장)

※다음 회는 '덕흥리 벽화무덤' 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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