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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나 하지 농구는 무슨…] 32. 88서울올림픽 유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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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 1981년 독일 바덴바덴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88서울올림픽 개최가 결정되자 박영수 서울시장(두손을 치켜든 사람) 등 유치위원들이 환호하고 있다. [중앙포토]

1980년 나는 신용보증기금에 근무하면서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었다. 당시 조상호 대한체육회장이 KOC 위원장을 겸하고 있었다. 어느 날 KOC를 소집해 다짜고짜 88올림픽을 서울에 유치하는 것이 어떠냐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 집권 말기인 78년 서울에서 세계사격선수권대회를 연 뒤 올림픽을 서울에 유치해보자는 의견이 나왔다. 이듬해 10월 대통령의 재가를 거쳐 88올림픽 서울 유치 추진이 공식 발표됐다. 그러다 10.26 이후 이 일은 흐지부지됐다.

조 회장은 88올림픽 서울 유치와 관련해 KOC 위원들에게 찬반 의견을 물었다. 한국은 경제난으로 74년 아시안게임조차 반납한 처지였다. 올림픽은 꿈도 못꾸는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대다수 위원은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다만 체육인 출신인 나와 장충식(전 단국대 총장)이 찬성 의사를 나타냈다. 올림픽 유치안은 부결됐다. 그런데 2주일 뒤 조 회장은 다시 KOC 위원들을 소집하더니 상의 안주머니에서 두장짜리 '대통령 친서'를 꺼내 읽어줬다. '88올림픽 서울 유치의 당위성'이란 제목 아래 일곱가지 이유가 담겨 있었고, 끝엔 '대통령 전두환'이란 친필 서명이 되어 있었다. 친서를 다 읽은 조 회장은 위원들에게 찬반 의사를 물었다. 사실상 '대통령의 지시'인데 반대가 있을 수 없었다.

81년 9월 30일 나는 퇴근 후 직장 동료와 술을 마시고 있었다. 오후 9시가 지날 무렵이었다. KBS 김재길 PD가 술집으로 전화했다. "88올림픽 개최지 결정 장면이 바덴바덴에서 생중계 되니 급히 KBS로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서둘러 여의도 KBS 신관으로 달려갔다. 김 PD는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혹시 서울 유치가 결정되면 생중계가 끝난 뒤 좌담회 프로그램을 편성했다"며 내게 사회를 맡아 달라고 했다. 나는 화장실에서 찬물로 머리를 감고 얼굴을 씻으며 술 기운을 없애려고 애썼다.

"전국에 계신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 바덴바덴에선 88올림픽 개최지가 서울이냐 나고야냐가 결정되는 중요한 순간입니다." 드디어 생중계가 시작됐다. 당시 파리 특파원이었던 박성범(국회위원)씨가 회의장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해줬다. 그때까지 서울시나 방송국의 분위기는 매우 비관적이었다. 우리를 부른 김 PD도 "30분만 있다가 개최지가 결정되면 집에 가도 됩니다"며 미안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마란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이 개표 결과를 발표하면서 상황은 돌변했다. "서울 52, 나고야 27." TV 화면을 통해 들려온 현장의 소리가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 스튜디오는 돌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나는 제대로 준비도 안 된 상황에서 올림픽 유치 기념 특별좌담을 진행하느라 다음날 오전 3시까지 애를 먹었다.

김영기 전 한국농구연맹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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