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치고, 쪼개고 … 경제 어려울 때 경쟁력 키우자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20호 24면

현대·기아자동차그룹의 자동차부품회사 현대모비스와 전장업체 현대오토넷은 25일 ‘한 몸’이 됐다. 멀게는 2000년대 초반부터, 가깝게는 지난해 6월부터 추진해오던 두 회사 간 합병 이슈를 매듭지은 것이다. 23일엔 코오롱그룹 주력사인 ㈜코오롱과 패션 계열사인 FnC코오롱이 각각 임시주주총회를 열고 합병 승인 건을 통과시켰다. 두 회사는 오는 8월 1일 ‘한 식구’가 된다. LG그룹의 전자부품회사인 LG이노텍과 LG마이크론도 다음 달 1일로 합병, 매출 3조원대 회사로 재탄생한다.

지금 대기업은 대수술 중

이에 앞서 이달 1일 국내 최대 유선통신회사인 KT는 이동통신 자회사인 KTF를 합병해 ‘통합 KT’로 새 출발했다. 새 KT의 매출은 19조원대에 이른다. 이뿐 아니다. 재계엔 SK텔레콤-SK브로드밴드, LG텔레콤-LG데이콤-LG파워콤 등의 합병설이 계속 나오고 있다. 주요 대기업이 계열사와 합병하는 ‘통합 러시’가 유행이 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멀쩡한 기업이 쪼개지기도 한다. 올 초 삼성테크윈의 디지털카메라 사업부문이 독립해 삼성디지털이미징으로 새 출발했고, 4월엔 LG화학의 산업재 사업부가 LG하우시스라는 이름으로 분사한 바 있다. 대기업의 이런 ‘포트폴리오 대수술’에 대해 전문가들은 “서로 다른 움직임처럼 보이지만 공통 키워드는 경쟁력 강화”라고 풀이한다.
 
시장 변화 따른 적극적 대응
“과거의 자동차가 기계 조립체였다면 앞으로는 첨단 정보기술(IT)로 무장한 전자 시스템으로 진화할 것이다.” 자동차 전문가마다 강조하는 ‘미래 자동차’ 얘기다. 현대모비스와 현대오토넷의 통합은 이런 추세를 그대로 보여준다.

자동차에 들어가는 부품 2만5000여 개 가운데 전자부품 비중은 현재 25%가량 된다. 전문가들은 이 비중이 2~3년 안에 40%까지 커질 것으로 전망한다. 세계 자동차부품 업체의 대응이 분주해질 수밖에 없다. 프랑스의 발레오는 미국 존슨컨트롤의 엔진전자 부문을 인수했고, 캐나다의 마그나는 미국 IBM과 손잡고 자동차 전자부품 연구개발을 강화하고 있다. ‘자동차의 전자화’ 추세에 발맞춰 세계 18위 자동차부품 회사인 현대모비스 역시 전장업체(현대오토넷)와 합치게 된 것. 모비스 관계자는 “통합 연구개발, 인력 배치 효율화 등으로 2015년까지 6000억원대의 비용 개선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통신 빅뱅’을 예고하는 KT의 KTF 합병 역시 ‘달라진 시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조치로 풀이된다. 유·무선 통신이 기술적으로 통합되면서 두 회사가 ‘다른 살림’을 차릴 이유가 사라졌다는 얘기다. 대신증권 천영환 애널리스트는 “고객 정보를 공유하고 다양한 통합 상품을 만드는 등 보다 활발한 마케팅 활동을 벌이는 데 두 회사로 따로 존재하면 법적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수익성이 악화되고 있는 KT로선 연 6000억원대 이익을 내는 KTF와 합병함으로써 실적 개선 효과까지 기대할 수 있다.

자산 25조원, 매출 19조원대 새 KT의 출현에 경쟁사인 SK와 LG가 어떻게 대응할지도 관심거리다. 먼저 SK텔레콤과 SK브로드밴드의 합병설이 단골처럼 고개를 내민다. 다만 청산소득세 문제 등으로 두 회사의 합병은 일러야 내년 상반기에나 구체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천영환 애널리스트는 “인수 회사를 2년이 지나기 전에 합병하면 (SK텔레콤은) 800억원대 세금을 물어야 한다”며 “인수 2년이 되는 시점인 내년 4월 이후에나 논의가 활발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LG텔레콤과 LG데이콤, LG파워콤 등 이른바 LG그룹의 ‘3콤 회사’ 합병설도 거론된다. 유선 통신사인 데이콤과 파워콤 합병은 가시화하고 있다. 데이콤 관계자는 “구체적으로 결정된 것은 없지만 (합병은) 계속 검토 중인 사안”이라고 전했다. 문제는 파워콤 주가다. 이 회사 2대 주주인 한국전력은 파워콤의 장부가격을 주당 7500원으로 잡아놓고 있다. 그러나 26일 종가는 6500원. 한전이 지분 매각 협상을 머뭇거리는 이유지만 주가 움직임에 따라 언제든지 합병 논의가 진전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다음 달 1일 ‘LG이노텍’으로 새 출발하는 LG이노텍과 LG마이크론은 차근차근 합병을 준비해온 케이스. 지난해 초 두 회사 최고경영자(CEO)로 겸임 발령받은 허영호 사장이 통합 밑그림을 그려 왔다. 이 회사가 몸집을 키우는 논리는 ‘규모의 경제’ 실현이다. ‘그룹 물량’을 소화하는 수준에서 글로벌 종합부품 기업으로 성장하려면 매출 3조원은 돼야 한다는 것. 이쯤은 돼야 연구개발, 비용 절감, 투자 재원 확보 등에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덩치가 커지면 속도가 굼떠지게 마련이지만 이 회사는 오히려 고객 대응이 빨라진다는 것을 ‘합병 메리트’로 내세운다. LG이노텍은 모바일·디스플레이·전장부품 쪽에서, LG마이크론은 반도체소재·인쇄회로기판(PCB) 쪽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다. LG이노텍 관계자는 “마이크론은 소재 가공에, 이노텍은 부품 생산에 특화돼 있다. 서로 중복 분야가 없으면서 거래 회사 연계가 잘 돼 있어 시너지가 기대된다”고 소개했다.

화학·소재 회사인 코오롱이 ‘코오롱스포츠’ ‘잭니클라우스’ 같은 패션 브랜드로 유명한 FnC코오롱과 합병하는 이유는 수익성과 안정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서다. 임추섭 코오롱 이사는 “새 합병 법인은 미래 성장형 사업에 집중하는 수출 중심의 산업재 부문과 안정적인 수익을 내는 내수 중심의 소비재 부문이 통합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자산 2조원, 매출 2조5000억원, 영업이익 2000억원대 대형 기업이 됨으로써 신규 투자, 인수합병 등 전략적 의사결정이 원활해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시장 평가도 긍정적이다. 삼성증권 이도연 애널리스트는 “코오롱이 현금창출 능력이 뛰어난 패션사업 부문을 흡수해 안정성과 성장성을 확보했다”고 분석했다.

언스트앤영 장동인 전무는 “KT-KTF 합병 등 최근 대기업의 ‘덩치 키우기’는 변화된 시장 환경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경쟁력 확보 차원에서 바라봐야 한다”며 “조직이 방만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회사 내 회사’를 갖추는 등 책임 경영 시스템도 갖추고 있어 한층 선진화됐다”고 분석했다. 장 전무는 또 “부실 계열사 지원을 위해 비관련 계열사까지 한 우산 아래 합쳤던 외환위기 당시의 합병 러시와도 구별된다”고 말했다.
 
“외환위기 때와 접근방식 달라”
대기업 포트폴리오 재조정은 합병이 대세인 듯하지만 거꾸로 가는 사례도 있다. 올 초 삼성테크윈은 디지털카메라 사업부문을 분할, 삼성디지털이미징을 출범시켰다. 삼성SDI는 OLED 사업부를 떼내 삼성전자와 함께 삼성모바일디스플레이를 만들었다. 이러면서 삼성그룹 전자 계열사는 새롭게 진용을 갖췄다. LG화학도 지난 4월 산업재 사업부문을 떼어내 LG하우시스를 만들었다.

삼성의 신생 전자 계열사나 LG하우시스는 ‘비주력’ 내지 ‘신수종’으로 평가받던 사업부문을 성장 가능성을 내다보고 분사한 사례. 삼성디지털이미징은 분사 이후 디지털카메라 신제품을 대거 내놓는 등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삼성테크윈 사업부로 있던 시절 디지털카메라 부문은 방산·보안 부문에 가려 있었다. LG하우시스의 산업재 사업 역시 석유화학·정보전자소재·전지사업을 벌이는 LG화학에서는 ‘그늘’에 있었다. 그러나 이 회사 한명호 대표는 “기존 사업방식, 내수 중심에서 벗어나 2015년 매출 4조원, 해외 비중 40%에 이르는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딜로이트컨설팅 김경준 부사장은 “최근 대기업 분사는 한계 사업을 정리하거나 인적 구조조정을 목적으로 했던 외환위기 때의 ‘마이너스형 분사’에서 한 차원 업그레이드한 사례”라며 “일개 사업부서에서 독자 회사가 됨으로써 자원 배분을 집중해 스피드 경영을 강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 부사장은 다만 대기업의 한계 사업 정리 역시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