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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는 중산층]중.“줄여 끊어”가계도 구조조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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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대기업 부장인 金모씨. 30% 깎인 월급봉투에다 언제 쫓겨날지 모른다는 중압감에 요즘은 몸마저 예전같지 않다.

가계부 적자를 메우겠다고 나선 아내는 일거리를 찾지못해 초조한 심정이다.

대학 4학년이어야 할 아들은 올해 휴학을 했지만 내년이라고 사정이 나아질 것 같지 않아 걱정이다.

대입을 앞둔 고3 딸은 공부가 손에 잡히질 않는다.

전 국민의 70%가 스스로를 중산층이라고 믿어왔던 '중산층 환상' 이 거품 경제구조와 함께 무너지면서 가족사회가 급격한 변혁을 겪고 있다.

불황이 장기화할 것으로 예측되면서 가정도 고통스러운 현실을 인정하고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는 시스템으로 전환해야 하는 시기가 된 것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교육비만큼은 요지부동이던 가계부에서도 과외비나 학원비 항목이 삭제되고 있다.

'아이들 교육은 남들만큼 시켜야 한다' 는 상식 아닌 상식이 깨지고 있는 것. 한국소비생활연구원이 최근 가정주부를 대상으로 실시한 'IMF 관리시대 가계 관리실태도 달라졌는가' 하는 설문조사에서도 84%가 '그렇다' 고 대답했다.

가계의 고통이 이중삼중으로 가중될 것이 기정사실인 이상 실질적인 소득수준에 맞춰 소비를 줄이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과제다.

실제로 가정주부들 사이에선 가계부 다시쓰기 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1백원이라도 그 용도를 세세히 기록하다 보면 쓸데없는 소지가 얼마나 많은지 실감, 10%라도 절약할 수 있는 효과가 있다.

그동안 거품처럼 늘어온 외식비, 교통.통신비 등 따져보면 줄일 수 있는 구석은 많다. 가계부는 주부만의 몫이 아니다.

남편이나 자녀들도 가계부 작성에 참여하고 각자 용돈 기록장을 만드는 등 함께 애써야한다.

또한 소득원에 대한 전면적인 '가족 구조조정' 도 필요하다.

가장이 모든 부담을 떠안은 채 가사노동에 전념하는 주부, 서른이 되도록 부모에게 얹혀사는 것을 당연시하는 자식들간의 관계가 재조정돼야 한다는 것. 최근 일고 있는 일종의 대가족제도로의 회귀현상도 그 한 예가 될 수 있다.

어른들과 살림을 합쳐 전세값을 절약한다.

취업전선으로 나서는 며느리를 위해 시부모들이 어린 아이들을 봐주기로 한다. 난방비.전기요금.수도요금.식비 등을 최소화하는 '규모의 경제' 도 가능해진다.

여성학자들은 이같은 구조조정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의식의 전환도 병행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새로운 부부 방정식' 을 세워야 한다는 것. 즉,가족의 형태와 구성원의 역할이 바뀌었는데도 '남성 = 생계 유지자' 라는 기존 성역할을 고집하는 한 남성의 열등의식은 커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내 가족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벌어먹인다' 는 전통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남성일수록 실업의 충격을 크게 받는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1가구 1직업' 으로 힘들다면 가장 외에 주부나 장성한 자식들이 적극적으로 나서 '1가구 2~3직업' 을 찾아봐야 한다.

일자리 잡기가 어렵다지만 눈을 더 낮추고, 자기계발을 한다면 가계에 보탬이 될만한 어느 정도의 벌이는 찾아볼 수 있다.

이런 노력은 문제가 심각한 상황에 빠지기 이전에 이뤄지는 게 바람직하다.

기업도 주력상품의 판로가 막히면 다른 상품으로 수출을 대신하듯 가정경제도 남편과 아내.자식 등이 탄력적으로 변화에 대응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가계관리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가족간의 유대강화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이혼이나 가정폭력 등으로 가정이 해체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이에 대해 신경정신과 전문의 박진생 (朴鎭生) 박사는 "경기불황으로 가정경제에 위기가 닥쳤을 때 이를 극복하고 가정을 지키기 위해선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고 서로 배려하는 가족사랑이 최우선" 이라고 말했다.

가정해체는 사회적 불안정과 직결된다.

복지의 기초단위인 가정이 사회적 안전망의 역할까지 대부분 떠맡아온 상황에서 가정해체는 사회적 약자인 주부나 아동들을 극단적인 상황으로까지 내모는 결과를 초래한다.

따라서 정부도 이른바 사회적 안전망 구축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퇴직금.학자금 융자.직장보육시설 등의 형태로 상당한 역할을 해온 기업들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정부의 역할은 더욱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원낙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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