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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만 계약” “관계사 잠깐 가 있어” 비정규직 혼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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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서울 역삼동의 정보기술(IT) 벤처기업인 B사는 최근 연구개발과 사무 보조로 일하는 비정규직 3명을 고용한 지 2년이 다가오자 관계사인 P사로 소속을 옮겨 놨다. 그러나 이들이 하던 일은 예전과 똑같다. 소속만 바꿔 계속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것이다. P사는 B사와 서류상으로는 관계없지만 실제로는 자회사다. 익명을 요구한 이 회사의 총무 담당인 강모(42) 전무는 “꼭 필요한 인력은 고용 기간 2년이 되기 전이라도 정규직으로 전환하지만 애매한 경우가 더 많다”며 “당사자와 합의해 관계사로 옮겨 놓고 계속 비정규직으로 일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처럼 경기가 불투명한 데다 비정규직법 개정안이 어떻게 처리될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이런 방법을 쓸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경기도 안산의 전자업체인 J사는 고용 기간 2년이 다가오는 비정규직 직원 5명을 비슷한 업종의 다른 회사에 임시로 취업 알선을 해 줬다. J사는 몇 달 뒤 이들을 다시 고용했다. 2년간 숙련된 비정규직의 기술이 아까웠지만 정규직으로 전환해 주기에는 부담스러웠기 때문에 이 같은 편법을 쓴 것이다. 이 회사의 인사 담당자는 “비정규직 직원은 정규직 일자리를 찾을 때까지는 경력이 끊어지지 않게 하려고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회사 측의 요구를 들어준다”며 “다른 기업들도 이와 비슷한 방법을 많이 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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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들이 비정규직 고용에 이 같은 편법과 탈법을 동원하는 것은 법 개정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이다. 여야의 극한 대립으로 개정안이 어떻게 처리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법이 적용되는 시기(7월 1일)까지 무작정 비정규직을 그대로 둘 수만은 없다는 얘기다. 고용 기간 2년이 다가오는 비정규직들을 일단 해고한 뒤 필요할 때 다시 고용하자는 분위기가 팽배한 것도 이 때문이다. 국내 임금 근로자 3명 중 1명이 비정규직이다. 또 비정규직의 94%가량이 300인 미만 중소기업에서 종사하고 있다. 중소기업은 대기업에 비해 경영 예측이 불확실하고 시장에서 진입과 퇴출이 빈번하기 때문에 인력 운용을 신축적으로 할 수밖에 없다. 비정규직과 고용 계약을 1년 단위로 하던 기업이 법 적용 시기가 다가오면서 계약 기간을 6개월, 3개월, 1개월 단위로 계속 줄이고 있는 것도 이와 관련 있다.

서울 양재동에 있는 IT 컨설팅회사인 B사는 직원의 24%가 비정규직이다. 이 회사는 프로젝트를 수주하면 우선 필요한 인원을 회사 직원 중에서 채우고, 부족하면 비정규직으로 충원했다. 이 회사는 그러나 앞으로는 비정규직을 고용하는 대신 용역회사를 통해 인력을 채울 계획이다. 해당 분야의 수요가 일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할 수 없어서다. 중앙대 오계택(경영학) 교수는 “중소기업이 비정규직을 쓰는 주된 이유가 인건비 절감보다는 고용 유연성 확보 때문”이라며 “따라서 중소기업들이 법적인 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비정규직을 고용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공공기관도 비정규직을 어떻게 처리할지 혼란에 빠졌다. 비정규직 보호법이 적용되는 시기가 며칠 앞으로 다가오면서 일단 비정규직을 해고하는 공기업이 늘고 있다. 보훈병원은 최근 이달 말로 고용 기간 2년을 맞는 조리사(9명)·행정기능직(7명)·시설기능직(2명) 등 비정규직 23명에게 해고 통보를 했다. 대한주택공사도 이달 말 고용 기간 2년이 되는 비정규직 40여 명을 해고하기로 했다. 구로구시설관리공단은 134명 중 82명이 비정규직이다. 7월 계약이 만료되는 50명 중 18명을 무기 계약직으로 전환할 예정이지만 정부의 개정안 처리가 불투명해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이승녕·문병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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