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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빈 칼럼] 내 마음속 밀레니엄버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지난해 4월 스웨덴 스톡홀름대에서 유럽한국학회 학술대회가 열렸다. 유럽전역의 한국연구자들 모임이다. 이 자리에서 조선왕조실록 CD롬 시연회가 있었다.

서울시스템의 개발책임자 김현 (金炫) 상무가 4장의 CD를 차례로 작동시켰다.

검색어 '코끼리' 를 클릭한다. 순식간에 일본 막부의 한 장군이 조선 국왕에게 코끼리를 진상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곧 이어 그 코끼리에 무엇을 먹여야 할지, 어떻게 보살펴야 할지, 누가 책임을 져야 할지를 고민하는 기록이 나온다. 좌중은 아연 경악하기 시작했다.

조선조 대동법 (大同法) 연구자 제임스 루이스 (옥스퍼드대 동양학연구소) 교수가 대동법 관련기록을 보자고 했다. 곧장 조선조 대동법에 관한 모든 기록들이 화면에 뜬다. 루이스 교수가 3년 걸려 찾아낸 기록이 단 3분만에 그것도 한글로 번역돼 나온다.

"야!이건 혁명이야!" 탄성이 회의장을 가득 메운다. 태조에서 철종에 이르는 조선왕조 25대 4백72년의 역사기록을 담은 조선왕조실록은 1천8백93권 8백88책 분량이다. 국역본도 4백13권에 이르는 방대한 자료다. 기사수 36만3천1백61건, 사용문자 1억9천8백만자다.

이를 모두 데이터베이스화하고 7천4백만개의 검색어를 설정해 4장의 디스켓으로 압축한 것이 '국역 조선왕조실록 CD롬' 이다. 서울시스템의 이웅근 (李雄根) 박사가 사재 50억원을 투자해 2년여 고생 끝에 개발한 것이다.

李박사는 공공도서관이나 대학도서관 중심으로 적어도 1천질만 구입하면 투자액은 건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정가를 5백만원으로 정했다.

그러나 3년이 흐른 지금껏 그 절반도 소화하지 못한 상태에서 전자상가 주변에서는 복제본이 수십만원에 거래된다는 소문이 들리고 있다. 컴퓨터로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소프트웨어 '글' 의 우수성을 안다. 글은 소리나는 대로 쓸 수 있는 게 장점이다.

'부장님 전니다' 라고 적을 때 다른 워드프로세서는 이를 옮기지 못한다. 펩시콜라를 '시콜라' 로 표기하려면 글을 써야만 가능하다. 기존 워드프로세서는 2천3백50자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완성형이지만 글은 자체 한글처리기능을 갖춰 조합이 가능하고 윈도 환경에서도 고어 (古語) 및 한자 1만8백80자와 다양한 외국어를 모두 사용할 수 있다.

가로.세로 쓰기가 가능해 문서작성에 특별한 장점을 지닌다.

이 글이 사라질 운명에 처했다. 글 개발로 청소년들의 우상이 됐던 이찬진의 한글과컴퓨터사가 미국 마이크로 소프트사의 공동투자로 사실상 합병됐다.

글 개발도 중단됐다. 시장점유율 80%를 차지하면서도 복제품 성행으로 10% 정도의 정품밖에 팔리지 않아 한국 최초의 성공한 벤처기업이 무너진 것이다.

글과 CD롬 왕조실록은 우리문화의 자존심을 정보화와 세계화의 흐름에 맞춰 선보인 대표적 벤처상품이다. 세계인을 향한 한국인의 세계화 전략무기이면서 우리의 독창적 문화 로컬리티를 글로벌 스탠더드로 승화시킨 문화 발신의 첨단도구라고 볼 수 있다.

대통령의 해외순방때 우리 말과 역사의 정수를 외국인에게 선보일 수 있는 가장 값진 선물이기도 하다. 이 값진 개발품이 분별 없는 복제품 성행으로 좌절과 실의에 빠져 있다.

두 벤처기업의 좌절과 실망은 과연 우리가 벤처기업을 육성할 최소한의 토양이나 자질을 갖추고 있나 하는 의문과 직결된다. 어느 나라나 해커가 있고 무단복사 암시장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정부의 엄중단속과 사용자의 도덕심으로 복제품이 30%를 넘지 않는 게 상례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90%의 불법복제품이 판을 치고 이것이 당연시된다. 정부가 단속할 생각도 대책도 없다. 이런 환경 속에서 벤처기업 육성으로 나라를 살릴 수 있는가.

1백억원 남짓으로 한글의 자존심이 무너진다면 금반지를 빼 금을 모으듯 국민적 캠페인을 벌여야 한다.

이민화 (李珉和) 벤처기업협회장의 제안처럼 지금까지 공짜로 써 온 사용자라면 1만원씩의 모금운동을 벌여 넘어지는 벤처기업을 살려야 한다.생각 있는 정부라면 1백50만대의 공공기관 PC에 글 정본을 구입해 장착하자는 논의를 했을 것이다.

전국 공공도서관과 대학도서관이 두 벌씩 실록 CD롬을 설치한다면 역사의 대중화에 기여하고 벤처기업에 힘을 실어 줄 수 있다.

우리는 너무 자존심이 없다. 부끄러움을 모른 채 살고 있다. 최소한의 애국심마저 없다. 내 마음속 밀레니엄 버그를 해결하지 못하면서 새 천년의 역사를 맞을 자격이 있는가.

권영빈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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