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실퇴장]부라보콘도‘퇴짜’라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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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이제 부라보콘 맛은 못보게 되는가.

누구나 어린시절부터 입맛을 익혀온 과자와 사탕을 만들어주던 해태제과는 끝내 무너지는가.

18일 낮 서울용산구남영동 해태제과㈜ 본사. 45년 해방과 함께 설립된 해방둥이 기업 해태가 끝내 퇴출기업 명단에 올랐다는 소식이 전해진 이날, 해태 사옥 전체엔 무거운 침묵이 뒤덮여 있었다.

직원들은 "지난해 11월 부도이후 이미 많은 것을 각오해왔다" 며 말을 아꼈다.

"다른 계열사들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해태제과만은 살려줄 수 없겠느냐" 던 그룹 박건배 (朴健培) 회장 역시 사원들에게 별다른 말이 없었다.

<본지 6월8일자 21면 보도> 바밤바와 부라보콘, 맛동산과 땅콩 알사탕의 회사. 한국시리즈 9회 우승에 빛나는 명문 프로야구단 해태타이거즈의 모기업. 그러나 젊은 2세 오너회장의 무리한 사업확장, 무분별한 차입경영, 구조조정노력 미흡이라는 우리 대기업들의 고질에 국제통화기금 (IMF) 이라는 복병마저 겹쳐 '꿈을 심는 기업' 을 자처한 해태도 퇴출리스트에 오르고 말았다.

예산관리팀 이종훈 (李種勳.37) 차장은 "지난해 11월 부도이후 그룹계열사 가운데 가장 많은 이익을 내고 있고 최근 외국자본유치에도 애쓰고 있다" 며 "비록 부채가 많다고는 하지만 한달에 1백20억~1백30억씩 이익을 내고 있는데…" 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물론 해태 사람들은 아직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입사 2년차 사원 문성준 (文聖竣.28.채권관리팀) 씨. "지난달 월 매출액이 7백50억원으로 회사설립 이후 최대액수를 기록했다" 며 주먹을 불끈 쥐어보이던 그는 "회사사정이 점차 나아지고 있는데…" 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14년 경력의 베테랑 영업사원인 수원영업소 최명섭 (崔明燮.38) 소장. 모범사원상만 세차례나 받은 그는 "해태를 걱정하는 많은 고객들의 격려가 끊이지 않고 있다" 며 "꼭 재기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며 애써 자위했다.

안타깝기는 해태를 아껴온 소비자들도 마찬가지. 회사원 김영호 (金永鎬.32.경기도성남시분당구) 씨는 "뭔가 어릴 적 소중했던 추억이나 친한 친구를 갑자기 잃은 느낌" 이라며 아쉬워했다.

오후7시. 박건배 회장은 회사 정문을 나서 퇴근길 승용차에 올랐다.

평소와 다름없는 시각이었다.

그는 4천여명의 사원, 3백여개 협력업체와 거기에 딸린 수만명의 식구, 아니 그보다 수백배 많은 '해태 식구' 들을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최재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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