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괴담' 인기로 되돌아본 하이틴영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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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하이틴 영화는 예나 지금이나 영화제작자에게 매력적인 장르다. 영화의 내용과 자신들을 동일시하는 10대 특유의 응집력이 단단한 시장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소구점은 동서고금이 공히 사춘기적 고민에 맞춰진다. 성적 (性的) 호기심, 사랑, 가난, 진로….

그러나 우리의 10대에게는 이 모든 사춘기적 고민을 오히려 사치로 만드는 문제가 있다. 바로 입시다.

우리의 하이틴영화가 그것이 희극이든 해피엔딩이든 비극적 분위기를 띠는 이유는 입시 문제가 영화를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여고생들로부터 열광적 호응을 받는 '여고괴담' 도 집단내 소외와 폭력 문제가 주제라고 하나 갈등의 빌미는 목숨을 건 성적 경쟁이다.

한국의 하이틴 영화는 70년대 중후반 붐을 이뤘다. 그리고 80, 90년대의 소강상태를 거쳐 '여고괴담' 에 이르렀다.

문제는 시대가 바뀌면서 10대의 문제가 치유되기는 커녕 더 악화됐고 이것이 그대로 영화에 반영돼, 우리의 하이틴 영화 계보는 10대의 비극史라는 과장도 가능해진다.

70년대 하이틴 영화 붐의 시직은 김응천감독의 '여고 졸업반' (75) .임예진을 일약 하이틴 스타로 부각시켰다.

이 영화가 나올 무렵은 유신 이후 긴급조치가 발동된 상황이라 시민적 권리가 유보 내지 박탈된 상태였다.

경찰들이 가위를 휴대하고 다니며 '장발단속' 을 하고 미니스커트를 단속한다고 처녀들의 허박지를 자로 재댔다.

그래도 대학생 선배들은 통기타와 청바지의 '청년문화' 로 시대의 답답함을 해소할 수 있었다. 하지만 10대들은 그 어디에도 끼지 못한 채 안으로 모든 고통을 삭여야했다.

더구나 이들은 평준화 방침에 따라 추첨으로 학교가 할당되던 '뺑뺑이 세대' 였다. 같은 학교내에서도 우.열반이 나뉘었다.

'여고졸업반' 의 바통을 받아 76년 '진짜진짜 잊지마' (문여송감독) '진짜진짜 미안해' '진짜 진짜 좋아해' 등 이덕화, 임예진이 황금콤비를 이룬 '진짜시리즈' 가 학생들 사이에 화제를 불렀다.

특히 석래명감독의 '고교얄개' (76년) 는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숫자인 26만명을 극장으로 불러들였다.

명랑소설이라 불리던 조흔파의 50년대 소설 '얄개전' 을 각색한 이 영화의 성공은 '얄개' 라는 이름을 딴 시리즈의 신호탄이 됐다.

얄개시리즈는 외견상으로는 10대들의 설익은 로맨스가 중심이었다. 그러나 꼼꼼히 뜯어보면 여기에는 당시 일기 시작한 사회적인 갈등과 모순을 통합하려는 의지가 내밀하게 녹아있다.

이 영화들은 성격좋고 집안도 부유하지만 공부는 별로인 주인공이, 학교 성적은 뛰어나지만 집안은 찢어지게 가난한 학생을 도닥거리고 격려해주는 것으로 결말을 맺기 일쑤였다.

대학입시가 끝나면 식당 파출부하며 자식 교육시킨 홀어머니의 불어터진 손을 붙잡고 환하게 웃던 '수석입학자' 의 모습이 매스컴을 장식했고, 그 감동의 장면은 '성공신화' 가 되어 수천만 서민들로 하여금 현실의 고통을 잊게 만들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행복한 화해' 는 80년대 이후 사라져버린다. 부동산 투기등으로 '떼돈' 을 번 졸부들은 가속적으로 부를 축적했고 황금만능주의, 목적제일주의가 세상을 지배했다.

학교생활도 더 살벌해졌다. 5공 정권은 대학 본고사도 폐지하고 과외도 못하게 했지만 대신 '내신' 이라는 질나쁜 정책을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짝꿍에게 노트도 빌려주지 않는 살풍경한 공기가 교실을 메웠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쟎아요' (89년)에서 여고생은 성적의 중압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자살을 택하게 된다.

좋은 성적을 올리는 건 70년대처럼 신분상승의 수단이라기보다는 경제적인 안정을 찾은 중산층의 허영과 자기과식욕에서 비롯된 측면이 더 강했다.

그래서 '꼴찌에서 일등까지 우리 반을 찾습니다' (91년)에서는 졸부집안의 자식을 등장시켜 물질만능주의로 흐르는 세태가 어떻게 10대들의 인격까지 망치는지를 보여주었다.

달콤한 로맨스로도, 심지어 자살로도 치유되지 않은 10대들의 고통은 이제 '귀신' 이 되어 우리들 머리 위를 배회하기에 이르렀다.

이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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