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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황속 조선역사책 출간 붐…민족 자존심 되살리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서양의 르네상스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에 돌아가 법고창신 (法古創新) 했듯이 혼란한 이 시대의 가치 기준을 세우기 위해서 그동안 폐기처분하다시피 한 선조들의 시대정신을 법고하여 재해석해야만 이 시대에 필요한 가치관을 창신할 수 있다."

중견학자 정옥자 (서울대.국사학) 교수가 새로 펴낸 '조선후기 조선중화사상 연구' 의 결론은 이렇게 요약된다 (일지사刊) .임란 (壬亂) 과 호란 (胡亂) 이란 전쟁의 상처를 극복하고, 중국 명나라 멸망 이후 유교문화의 정수를 계승한다는 사상적 자부심과 함께 찬란한 문화를 일구었던 조선후기에 눈길을 돌린 책이다.

이처럼 조선시대를 돌아보는 역사책이 줄을 잇고 있다.

그것도 출판대란이란 극도의 불황 속에서 관련서가 끊이지 않아 주목된다.

교양서에서 학술서까지 왕.재상.예술.정치.사상 등 다양한 주제로 나오고 있다.

이런 현상은 크게 두 가지 갈래에서 해석된다. 우선 출판계 내부로는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들녘) ,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청년사) 등 일련의 베스트셀러로부터 촉발된 이 시대에 대한 관심이 갈수록 심화.확대되는 것으로 풀이된다.

다른 한쪽에선 시대적 분위기가 작용한다. '국가부도' 직전까지 내몰렸던 총체적 위기를 헤쳐가는 지혜를 조선시대가 달성한 높은 문화의식에서 읽어내고 있다.

정교수의 책은 이런 분위기를 대변한다. 우리의 문화전통이 굴절되기 이전인 조선후기 사회에서 현재의 문제점을 풀어가는 단서를 끌어냈기 때문. 흔히 사대주의.분파주의의 대명사로 이해되는 조선후기 성리학의 왜곡된 상을 바로잡는데 진력하고 있다.

그는 특히 16세기 말과 17세기 초 두 차례 큰 전쟁을 겪고도 국가재건의 방향을 도덕.문화국가로 잡고 19세기 외세압력에도 끝까지 민족자존을 지켜낸 사림 (士林) 의 정신을 통해 일제 망국기와 6.25 전란, 그리고 IMF에 따른 우리의 심한 좌절감과 역사에 대한 비하의식을 씻어내고 있다.

지두환교수 (국민대.국사학) 도 이달말 도서출판 역사문화에서 나올 '조선시대 사상사의 재조명' 에서 식민사관을 넘어서 조선시대를 긍정적으로 보는 80~90년대 연구성과에 입각해 성리학.양명학.실학 등을 종합적으로 고찰할 작정이다.

한영우 (서울대.국사학) 금장태 (서울대.종교학) 김충렬 (고려대.동양철학) 정민 (한양대.국문학) 최원식 (인하대.국문학) 교수등 중견학자 10명이 참여한 '시대가 선비를 부른다' 는 고결한 기개와 걸출한 지혜로 역사의 난국을 극복해간 조선 선비들의 흔적을 돌아보고 있다 (효형출판) . 조선 건국기 개혁정책을 주도했던 정도전부터 민중혁명으로 조국독립을 꿈꾼 신채호까지 세속적 가치를 뛰어넘어 학문.국가를 위해선 목숨마저 아끼지 않았던 23명의 발자취가 압축되어 담겨 있다.

'미친 사람' 이란 말을 들으며 이상적 왕도정치를 부르짖은 조광조, 임금에게도 두려움없이 직언을 아끼지 않았던 조식, 한일합방에 대한 책임감에서 아편덩이를 삼켜 자결한 황현 등 시대와 역사의 소임에 충직했던 선비들의 기개가 활달하기 그지없다.

학술진흥재단 박석무 이사장이 편역한 '나의 어머니, 조선의 어머니' 는 이같은 선비들을 만든 여인네 33명의 이야기 (현대실학사) .대체로 고관대작의 며느리, 명문 집안의 안방마님이지만 '갑남을녀' (甲男乙女) 의 임무도 모자람없이 해냈던 조선조 여인들의 저력을 후손들의 행장 (行狀.죽은 이의 일생을 기록한 글) 이나 묘지 (墓誌) 를 통해 밝혀냈다.

이율곡을 키워낸 신사임당의 예술적 재능과 온아한 성품은 널리 알려진 얘기. 그만큼 유명하진 않으나 퇴계 이황에게도 일찍 남편을 여의고도 자식 교육에 뒤짐이 없었던 춘천 박씨가 있었으며, 청상과부로 아들 두 명을 대제학 (大提學) 까지 키운 김만중의 어머니 해평 윤씨의 일생은 근검절약 자체였다.

더욱이 고관 부인들은 손끝에 물 한방울 대지 않을 것이라는 우리의 상식과 달리 밥짓기.길쌈하기.가족부양에 잠시도 쉴 틈이 없었던 여인들의 실체가 새롭게 다가온다.

조선의 기둥인 선비정신과 선비들을 기른 여인들의 겸양.절약 정신은 결국 한 뿌리에서 나왔다는게 편역자의 지론이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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