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전투함 네 척의 해군’을 기억하라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한국전쟁 59주년 | 두 노병의 증언 일반인에게 6·25전쟁에서 대한민국 해군의 기억은 없다. 인천상륙작전도 맥아더가 이끈 연합군의 작품으로만 본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전쟁 초기 우리 해군은 중요한 고비마다 전세를 바꾸는 승리를 거뒀다. 전쟁 발발 직전과 직후 국내 최초로 들여온 전투함과 해병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6·25 59주년을 앞두고 당시 서해를 비롯한 우리 바다를 지켰던 국가 원로들에게 그때 그 바다의 얘기를 들었다. 제5대 해군참모총장(1960~62년)을 지낸 이성호(83)씨와 제6대 해병대사령관(1964~66년)을 지낸 공정식(84)씨가 그들이다. 두 사람은 한국전쟁 당시 국내에 단 네 척밖에 없던 전투함을 이끌던 원로 중 아직 생존해 있는 사람들이다.

1950년 6월 25일, 이성호(당시 해군 중령)ㆍ공정식(당시 해군 소령)씨는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바닷바람을 맞고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에 가서 2차 세계대전 이후 퇴역한 450t급 중고 전투함 3척을 구입해 돌아오는 길에 잠시 기착한 것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전투함 PC 701을 도입한 지 두 달 만이었다. 48년 9월 5일 정식 출범한 대한민국 해군은 1950년 이전까지만 해도 전투함 하나 없었다.

공 전 사령관은 그때를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했다. “손원일 제독(초대 해군참모총장)을 수행해 배를 탔던 나는 호놀룰루 시내에서 난생 처음 본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어요. 그때 미국 신문 호외가 뿌려졌는데 ‘북한 인민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서울을 향해 진격 중’이라는 소식이 실려있었어요. 너무 놀라 먹던 아이스크림을 바닥으로 떨어뜨렸어요.”

몇 시간 뒤 한국 정부에서 훈령이 떨어졌다. “손원일 제독은 군함과 함께 해로로 귀국하라.” 각각 702, 703, 704로 명명된 3척의 전투함은 서둘러 무장을 했다. 진주만 미 해군 수리창에서 3인치 기관포를 달고 예정보다 이른 26일 오전 10시 한국을 향해 출항했다. 703 인수 함장을 맡은 이 전 총장은 고국의 소식을 듣기 위해 함정의 라디오를 켰다. 일본 라디오 방송에서 뉴스가 흘러나왔다. “김일성 군대가 서울을 점령하고 부산을 향해 쾌속 진격 중이라고 했어요. 속이 타들어갔습니다.”

호놀룰루를 떠난 지 이틀이 되니 서울의 HLKA(KBS 전신) 라디오 방송이 잡히기 시작했다. 애국가 대신 인민군 군가가 흘러나왔다. 공 전 사령관은 “우리가 진해항에 입항할 때까지 대한민국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고 그날을 기억했다.

설상가상, 공 전 사령관이 탄 704 기관실에서 갑자기 요란한 폭음이 울리며 왼쪽 기관이 멈춰버렸다. 704는 진주만으로 다시 들어가 수리를 받아야 했다. 괌에 들러 3인치 포탄을 실은 702, 703은 20일 만인 7월 15일 진해항에 들어왔다. 704는 열흘 뒤인 25일에 들어왔다. 당시 북한군은 진해 바로 왼쪽 마산 인근까지 진군해 내려온 상태였다.

703함장 이성호 중령과 704함 부함장 공 소령은 곧바로 해병대와 함께 통영상륙작전에 투입됐다. 북한군이 점령한 통영을 빼앗아 진해와 부산을 지키기 위한 다급한 작전이었다. 703, 704함이 통영 남쪽 해안에 함포 사격을 퍼붓는 사이에 해병대가 통영 뒷산을 탈환한다는 계획이었다. 작전은 성공했다. 50년 8월 18일 통영 시내에 있던 북한군은 전멸했다. 육상에서 연일 북한군에 밀리고 패전하는 절망 끝에 들려온 승전보였다.

그때까지 우리 바다를 지킨 건 전쟁 발발 두 달여 전에 들여온 450t급 전투함 701이었다. 두 사람은 701함 도입 때도 손원일 제독과 함께 미국에 갔다. 701은 개전 다음날인 26일 오전 4시, 북한 특수부대원 600명과 무기ㆍ탄약 등을 가득 실은 1000t급 무장 수송선을 대한해협 바다에 수장시켰다. 전날 밤 11시4분, 부산 남쪽 8㎞ 해상에서 적선을 발견한 지 5시간 만의 승리였다. 우리도 수병 두 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봤다.

공 전 사령관은 “북한의 지상군이 38선을 넘어올 때 해군은 동해바다를 돌아 부산으로 상륙, 후방 교란작전을 벌일 예정이었다”며 “701이 없었더라면 6·25전쟁의 결과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두 노병은 요즘 들어 새삼 그때의 기억을 다시 떠올린다. 서해 연평도 앞바다에서 남북한 간 충돌 가능성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전 총장은 수병들의 안전을 가장 먼저 염려했다. “우리 아이들이 다치지 말아야 하는데…. 하지만 ‘전쟁을 안 해야 된다, 피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전쟁이 납니다. 국가가 유지되려면 먼저 튼튼한 울타리를 쌓아야 합니다.”

최준호 기자

중앙SUNDAY 구독신청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