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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중국 거치지 않고 서역과 문화 직교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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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눈을 ‘딱’ 감고 1500년만 거슬러 올라가 보자. 다시 눈을 뜬 당신 주변에 ‘금수강산’은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한반도 ‘삼천리’를 벗어나 북방 대륙, 대초원의 말발굽 소리가 귀에 쟁쟁할 것이다. 기원전 1세기에 건국해 서기 5세기에 동아시아 4강으로 군림한 나라. 유라시아 대륙 동·서 교류의 문화적 호수 역할을 했던 동북아의 패권국가. 당신은 고구려의 후예다. 고구려 고분벽화를 실물에 가깝게 재현한 그림이 16일부터 ‘몽골-투르크 벨트’ 첫 순회 전시회에 나섰다. 한국 외교통상부와 동북아역사재단이 주최한 이 순회전은 몽골에서 시작,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에서 고구려의 문화와 역사를 선보인다. ‘몽골-투르크 벨트’란 기원전 6세기부터 전(前)근대 사회까지 유라시아 북방을 가로지른 ‘문화 벨트’였다.


시인 고은은 몽골과 실크로드의 대사막들을 ‘내 정신의 숙영지’라고 읊었다. 한반도의 북방에서 동유럽까지 펼쳐지는 대초원이 그에겐 ‘꿈꾸는 대륙 공간’이었다. 고구려인들이 말 달렸던 북방 대륙, 그들이 무덤 속에서도 꿈꿨던 대륙 서쪽의 아득한 공간이 생생하게 담긴 고구려 벽화가 처음으로 몽골을 찾았다.

‘동아시아 고대 문화의 빛, 고구려’전이 16일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에 있는 몽골국립박물관에서 개막했다. 외교통상부·동북아역사재단·몽골국립박물관이 주최하고 중앙일보가 후원하는 행사다. 실물에 가깝게 복원한 덕흥리분·강서대묘 벽화를 중심으로 5세기 동아시아 4대 강국 중 하나였던 고구려의 문화를 소개하는 자리다.

몽골 전시를 시작으로 10월까지 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 등 이른바 ‘몽골-투르크벨트’를 순회한다. 중앙아시아의 사마르칸트에서 대초원을 지나 한반도를 거쳐 일본 열도까지. 고대 문명 교류의 중심지가 고구려였다. 그래서 이번 순회전은 적어도 1500년 이상을 거슬러 올라, 우리 문명의 시원을 찾는 여정이기도 하다. 몽골 현지 언론은 “5세기 때의 한국을 환영합니다”며 이번 전시를 반겼다.

고구려 고분벽화전이 16일 몽골 울란바토르 국립박물관에서 개막했다. 전호태 울산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맨 오른쪽)가 고구려 덕흥리 벽화(408년 축조. 북한 남포시 강서구역 덕흥동 소재)에 대해 몽골 관람객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사진 왼쪽에서 둘째가 어트겅바야르 몽골 교육문화과학부 장관. 그는 “몽골에서부터 고구려 벽화 전시를 시작하는 것은 두 나라의 긴밀한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몽골 ‘조니 메데’ 신문 제공]


전시 기획을 맡은 전호태 울산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고구려 벽화에는 중국을 거치지 않고 중앙아시아와 ‘초원의 길’을 통해 직접 교류했던 문화적 흔적들이 풍부하다”고 설명했다. 고구려의 고분벽화 속엔 당시 중국의 그림 속엔 드러나지 않는 인도·페르시아 계열의 회화 기법도 섬세하다. 예컨대 평양 천도 전 수도였던 국내성(현재 중국 지안)에 있는 장천1호분 천정부에는 하늘을 떠받치는 역사(力士)의 모습이 등장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두 어깨로 하늘을 메는 형벌을 받은 거인 신 아틀라스를 연상케 한다. 당시 고구려의 정치·군사적 ‘북방 동맹’을 뒷받침했던 문화적 ‘직교류’의 흔적일 수 있다는 것이 전 교수의 설명이다. 조선시대 이후 강화된 ‘중화중심적 사관(史觀)’ 속에서 이러한 개방적 정치·문화 교류의 역사와 그 중요성들이 희석돼 온 셈이다.

신연성 동북아역사재단 사무총장은 “이번 전시가 양국의 정치·경제 교류를 넘어 문화·역사에 대한 관심으로 심화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현재 몽골 인구 268만 명 중 1%가 넘는 3만4000여 명이 한국에 체류하고 있으며 한국에서 장기 체류 뒤 귀국한 이들만도 10만 명이 넘는다. 몽골 전시는 다음달 5일까지 계속된다.



몽골국립박물관 J.샤를보양 관장 “중국이 배제한 역사, 양국 공동 연구를”

고구려 벽화전을 공동주최한 몽골국립박물관의 J.샤를보양(52·사진) 관장은 이번 전시를 통해 한국·몽골 양국의 문화적 유대가 깊어지길 기대했다.

그는 “고구려 무용총 벽화의 수렵도는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그림”이라며 이번 몽골 전시를 반겼다. 화가이자 시인인 그는 고구려 벽화가 가진 예술적 가치, 그 자체를 높이 평가했다. 16일 샤를보양 관장을 만나 이번 전시의 의미에 대해 물었다.

-몽골 일반 국민들에게 고구려 고분 벽화는 어떤 느낌일 것 같나.

“몽골인들에게도 고구려 벽화가 익숙하게 다가올 것 같다. 몽골 고유의 회화 방식은 하나의 평면에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를 펼친다. 고구려 벽화에 나오는 여러가지 생활사 그림과 신화적 상징물들을 몽골인들은 쉽게 읽어낼 수 있다.”

-전시의 의의는 무엇이라고 보나.

“중국의 역사서들은 ‘이민족’들의 역사를 축소하는 경향이 있다. 이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 방법은 여러 나라의 학자들이 공동으로 연구·조사하는 것이다. 그 결과가 중국의 서술과 달리 나온다면 공식적 역사 기록도 달라져야 할 것이다. 이번 고구려 전을 계기로 몽골과 한국 사이에 학술교류가 더 깊어질 수 있길 바란다.”

-예를 들자면.

“‘흉노(匈奴)’는 중국 역사에서 작은 지역을 지배한 이민족으로 묘사된다. 2011년이면 제국 성립 2220주년을 맞는 흉노는 몽골 지역을 포함해 고대 중앙아시아 세계를 제패한 대제국이었다. 세계적 학자들의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여러 인종들로 구성된 흉노 세력은 기원 전후 동·서 문명 교류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중국의 시각에서 제외됐던 역사를 복원하는 국제적 작업이 성과를 거둔 셈이다.”



울란바토르서 한·몽 학술대회 “고조선은 흉노의 우익이었다”

한국과 몽골은 1997년 몽골에서 고고학적 조사를 실시한 이래, 선사시대 암각화 조사와 흉노시대 무덤 발굴 등 다양한 공동 학술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이번엔 고구려 벽화 전시회에 맞춰 현지에서 ‘한·몽 관계의 재조명’이란 주제로 16~17일 국제 학술대회를 열었다. 양국의 언어·역사·고고학 분야 학자들이 모이는 행사로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다.

윤형원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은 신라와 흉노의 무덤을 비교한 논문을 발표했다. 윤 연구관은 “흉노는 중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대제국을 건설한 세력”이라며 “당시 중국 한나라는 고조선을 ‘흉노의 우익’으로 두려워해 고조선을 멸망시키는데 주력했다”고 설명했다. 우리와 흉노의 역사적 관련성에 주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는 황남대총 등 신라 무덤에 나타나는 이중의 목곽·목관 배치가 흉노 무덤과 상당한 유사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몽골 과학아카데미 역사연구소의 촐몬 박사는 13~14세기 고려-몽골의 문화 교류를 고찰했다. 당시 ‘칸들의 질병’이라 불리던 왕족들의 통풍(痛風)을 치료하기 위해 고려의 약재용 생선이 널리 사용됐다고 한다. 또, 몽골 제국이 1289년 프랑스 국왕에게 보낸 외교문서는 아직도 실물이 보존돼 있는데, 그 재질이 ‘고려 종이’라는 국제 학계의 견해도 있다. 촐몬 박사는 “당시 고려의 우수한 문물이 몽골 제국을 통해 세계 각지로 전파되는 등 문화교류가 활발했다”고 지적했다.

이평래 한국외대 역사문화연구소 교수는 1920년대 몽골 외무부 문서 중 한국 관련 자료를 소개했다. 몽골은 1921년 소비에트 적군과 연합해 중국군을 몰아내고 독립을 선포했다. 몽골은 전세계에서 두번째로 공산정권을 수립했던 국가다. 소비에트와 가까웠던 몽골에서 다수의 한인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했다. 여운형(1886~1947), 김책(1903~51) 등도 몽골에 체류했던 대표적 인사들이다.

울란바토르(몽골)=배노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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