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그의 이야기는 나이 들지 않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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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저 가냘픈 풀에게 어째서 ‘도둑’이란 이름을 붙여야만 했던가? ‘도둑놈의 갈고리’, ‘도둑놈의 지팡이’(…)‘옥잠화나 ‘봉선화’같은 한자식 풀 이름에는 그래도 아름다움이 있다. ‘며느리밑씻게’, ‘며느리 배꼽’, ‘여우오줌’, ‘쥐오줌풀’, ‘코딱지나물’(…)아름답게 생긴 꽃에 그래도 멋있는 이름을 단다는 것이 ‘기생풀’ 정도인 것이다.” (‘풀 이름·꽃 이름’)

그저 우리 풀 이름과 꽃 이름 몇 개를 나열해놓았을 뿐인데 마치 문장에 보이지 않는 ‘이름표’가 붙은 듯 글의 지은이가 누구인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맞다. 이 글을 쓴 사람은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76· 본사 고문)이고, 오래 전 추억을 재생시키는 듯한 이 몇 줄의 글은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있었다.

그는 우리가 당연하게 불러오던 하찮은 풀·꽃 이름을 나열해 낯선 느낌을 자아낼 줄 알았고, ‘아름다운 것이래야 겨우 기생과 비교한 것’이라고 꼬집어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했다.

2006년 이어령 전 장관의 평론·문학작품·문화론에 세계 석학과의 대담을 망라해 『이어령 라이브러리』(전 30권)를 출간한 문학사상이 가장 인기있는 다섯 권(사진)을 개정해 내놓았다. 한국문화를 예리한 통찰력으로 분석한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를 비롯해 그의 일본 문화론을 담은 『축소지향의 일본인』, 우리 일상어에 담긴 뜻을 풀어쓴 『뜻으로 읽는 한국어사전』, 젊은이들에게 전하는 메시지 『젊은이여 한국을 이야기하자』, 어린시절을 회고하면서 쓴 에세이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다.

1962년 『흙 속에…』를 출간한 이래 40여 년간 원고에 다시 손을 대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온 이 전 장관은 이번 개정판에서 몇몇 글자를 직접 수정했다. ‘황토 흙’을 ‘황토’로, ‘지프’를 ‘지프차’로 바꾼 것을 다시 ‘황토 흙’‘지프차’로 원상복귀시킨 것이다. 그는 “세 살 때 배운 말 그대로 황토 흙이라고 해야만 고향의 그 붉은 산들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며 “그때의 흙, 새와 바람을 다시 살리고 싶어 겹침말을 그대로 썼다”고 말했다. 『하나의…』에는 컬러 삽화가 새로 들어갔고, 『축소지향의…』에는 사진 자료를 풍부하게 보탰다.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글을 쓴다”는 그는 자신이 쓴 “이야기들엔 나이가 없다”고 했다. 책을 다시 단장해 펴내는 이유다. 그는 “글은 물리적 공간을 벗어나 자유로운 시공 속을 넘나드는 것”이라며 “글로 이룬 나의 가상현실에서 젊은 세대와 다시 만나고 싶다”고 했다.

이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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