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과 대통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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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969년 제3공화국 때의 일이다. 박정희대통령은 3선개헌에 대한 김수환추기경의 지지를 얻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하루는 金추기경을 대통령 전용열차로 단독 초치, 서울역에서 마산 (金추기경의 교구장 전임지) 까지 함께 내려가면서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朴대통령의 마지막 청은 3선개헌을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金추기경은 끝내 '노 (No)' 라고 답했다.金추기경과 명동성당의 반독재 민권운동은 이때부터 본격화했고 현대정치사의 흐름에 한 획을 그었다.

87년 6.10 민주화항쟁으로 이어진 호헌반대 투쟁 때 金추기경이 보여준 지도자적 역량은 높은 평가를 받는다.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이 대통령을 뽑는 이른바 '체육관선거' 를 반대하며 직선제를 갈구하는 국민 여망이 대세였지만 지도급 인사 누구도 군사정권의 폭압 앞에서 입을 열지 못했다.

마침내 金추기경이 명동성당 미사 강론을 통해 앞장서 '호헌반대' 를 천명해 6.10항쟁의 물꼬를 틔웠다. 87년 대통령선거 때의 일화다.

민주당 김영삼후보와 평민당 김대중후보가 단일화 협상을 벌이면서 서로 金추기경의 지지를 끌어내려고 공을 들였다. 金추기경은 양측이 거듭 졸라대자 막판에 '선 (先) YS.후 (後) DJ' 안을 제시하면서 단일화를 간곡히 부탁했다.

이같은 안에 담긴 논리는 YS에 대한 군의 거부감정이 DJ에 비해 덜하고 전두환정권하 반군사독재 투쟁의 공로에서 YS가 앞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단일화는 끝내 실패, 노태우후보가 당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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