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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처럼 삼겹살로 사람 행복하게 하고 싶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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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13일 서울 강남역 근처 벌집삼겹살 강남CT점에서 열린 ‘사랑의 삼겹살’행사에서 한 할머니가 이승환 대표 뺨에 키스를 하고 있다. 신인섭 기자

13일 낮 12시쯤 서울 강남역 사거리 시네시티극장 뒤. 먹자골목 한쪽에 있는 삼겹살 집이 시끌벅적해졌다. 삼겹살 프랜차이즈 회사인 ㈜벌집이 마련한 ‘사랑의 삼겹살’ 행사에 200여 명의 어르신이 모여든 것이다. 예닐곱 명의 젊은 개그맨이 노래와 만담을 섞어 즉석 공연을 펼친 두 시간 내내 40여 평의 매장 안엔 박수와 웃음이 가득했다. 이 회사 이승환(33) 대표가 무대에 오르자 어르신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디서 많이 봤는데…” “테레비에 나온 개그맨이잖아”라는 웅성거림이 이어졌다. ‘소양강 처녀’ 등의 노래를 부른 이 대표가 어르신들의 장수를 기원하며 무대를 내려오자 할머니들이 앞다퉈 ‘사진 한 장 같이 찍자’며 손을 잡아끌었다.

이 대표는 아직 사업가로보다 개그맨으로 더 알려져 있다. 그는 1999~2002년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개그 코너 ‘갈갈이 삼형제’에 박준형·정종철과 함께 ‘느끼남’으로 출연했다. 95년 KBS 공채 13기로 개그맨이 돼 5년간의 무명 생활을 견딘 뒤였다. “시간이 남아돌아 선배 차를 운전해 주고 용돈을 벌기도 하고 거의 매일 대학로에서 공채 동기인 박준형과 즉석 공연을 하며 내공을 닦았던 시절”이었다. ‘갈갈이 삼형제’는 그의 몸값을 크게 올렸다. 이곳저곳에서 사회를 보거나 공연을 해 달라는 요청이 빗발쳤다. 무명 시절 700만원이던 한 해 수입이 10억원 이상으로 급증했다. ‘20대 중반의 나이에 성공했다’는 찬사가 이어졌다. 스스로도 구름 위를 떠다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잘나가던’ 시절이 2~3년 지나자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한때 ‘반짝’했다가 스러진 연예인들의 얼굴이 숱하게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언제까지 개그를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니 길어야 10년이란 생각이 들었단다. ‘갈갈이 삼형제’가 막을 내린 2002년 9월 그는 개그계를 떠나 사업을 시작했다.

처음 손댄 건 유아 교육용 셋톱박스였다. 지상파 방송에서 어린이 과학 프로그램과 유아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한 경험이 있는 데다 공익에도 부합할 것 같아서였다. 대기업에서 퇴직한 연구원들과 손을 잡고 회사를 만들어 동화·동요·영어·게임 콘텐트를 내장한 제품을 내놓았다. 화질과 내용 모두 자신 있었지만 현실의 벽은 두꺼웠다. 주 고객으로 생각했던 유치원 원장들이 ‘유명 회사 제품을 쓰지 않으면 학부모가 싫어한다’며 구매를 꺼렸다. 방방곡곡 200여 곳의 유치원을 찾아 다닌 보람도 없이 1년 만에 수억원을 까먹고 회사를 접어야 했다.

다음에 도전한 방송 제작업도 실패였다. ‘개굴맨 아저씨’로 출연한 재능방송의 ‘야랑이의 개굴개굴 이야기 유치원’이 인기를 끈 데 착안해 방송 내용을 DVD와 교재, 인형 등으로 만들어 팔았지만 반응이 썰렁했다. 곧이어 ‘개굴맨 아저씨의 대모험’이란 어린이 뮤지컬을 제작했지만 무대에 몇 번 올려보지도 못하고 수억원의 손실을 봐야 했다. 빌려 쓴 돈을 못 갚아 집안 곳곳에 차압딱지가 나붙었다. 실패 원인을 곰곰이 따져 보니 ‘겉멋 때문’이란 결론이 나왔다. “일찍 인기를 얻다 보니 다른 사람보다 스스로를 낫다고 여기는 오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겸손하고 열심히 살자’는 다짐을 하던 차에 2005년 네 번째 기회가 찾아왔다. 삼겹살 체인점을 하자는 제안을 받은 것이다. 생소한 분야라 고민하는 그에게 개그계 선배들이 조언을 했다. “개그맨이말로 사람을 즐겁게 하듯 음식으로 사람을 행복하게 하면 된다”는 거였다. 기왕 할 거면 제대로 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연예인들이 흔히 그렇듯 ‘얼굴’만 빌려 주는 데 그치지 않고 온몸을 다 던져보기로 했다. 수백 곳의 삼겹살 집을 돌아다니며 온갖 종류의 고기를 먹어 보고 서비스를 비교했다.

결국 ‘값싸고 맛있고 친절해야 한다’는 결론이 났다. 음식 장사보다 인테리어와 간판 비용으로 이익을 챙기는 프랜차이즈들의 문제점도 알게 됐다. 그는 네덜란드 농가와 계약해 벌집 모양으로 칼집을 낸 고기를 진공 포장으로 들여오기로 했다.

그렇게 시작한 ‘벌집 삼겹살’은 2005년 초 1호점을 낸 지 4년 반 만에 250호점을 열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여유가 없어 광고와 마케팅을 제대로 못했는데도 인터넷과 블로거들의 입소문을 타고 손님들이 찾아왔다. 지난해에만 100곳이 넘는 가맹점이 새로 문을 열면서 본사 매출도 150억원을 넘어섰다. 장사가 안 돼 문을 닫은 곳이 아직 한 군데도 없다는 게 이 대표의 자랑이다. ㈜벌집이 네덜란드에서 수입하는 삼겹살은 한 해 2000t. 국내 네덜란드산 삼겹살 수입량의 절반을 넘는다. 하지만 이 대표는 여전히 조심스러워한다. ‘잘나갈 때 조심해야 한다’는 실패의 교훈이 잊혀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 대표는 “고객 불만이 세 번 접수된 가맹점은 계약을 해지하고 장사를 잘한 가맹점엔 한 달간 재료를 무료 공급하는 등 품질 관리에 힘쓰고 있다”고 말했다.

‘사랑의 삼겹살’ 행사는 회사 설립 1년 뒤인 2006년 초부터 분기에 한 번꼴로 열고 있다. 우연히 복지시설 어린이들과 만난 게 계기였다. 부모와 떨어져 공동 생활을 하는 이들은 ‘다른 애들처럼 친구를 집으로 초대할 수 없다’는 사실에 주눅이 들어 있었다. 이 대표는 ‘잔치를 해줄 테니 친구들을 맘껏 부르라’고 했다. 매장에 어린이들을 모아 놓고 선후배 개그맨과 가수들의 도움으로 작은 공연을 열었다. 이 대표는 “행사가 끝나가자 돌아가기 싫은 아이들이 울음보를 터뜨려 눈물바다가 되더라”며 “단발성으로 생각했던 일이 자연스레 정기 행사가 됐다”고 말했다. 지난 3월 대구에선 2000명의 어린이를 초청해 대구보건대 콘서트홀에서 ‘사랑의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이 대표는 “1등 회사보다 오래 가는 회사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연예계의 인기처럼 프랜차이즈도 자칫 유행을 타고 반짝하기 쉽다. 그는 “가맹 점주들과의 ‘윈-윈’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의 회사는 달러당 원화 값이 900원에서 1550원으로 떨어질 때까지 가맹점 공급가를 올리지 않았다. 이후 올린 가격도 석 달 뒤 원래대로 다시 낮췄다. 매출 손실분이 30억원에 달했지만 대신 점주와 고객의 신뢰를 얻었다. 지난 설 때 그의 집엔 제주 은갈치부터 포항 과메기까지 전국 각지의 점주들이 보낸 선물이 쇄도했다. 한 점주는 하루 매출액 500만원을 ‘직원 회식이나 하라’고 건네주고 가기도 했다. 이 대표는 “내년께 편의점이나 할인점을 상대로 덮밥 유통 사업을 할 계획”이라며 “이제 개그맨이 아닌 사업가로 어느 정도 자리 잡은 것 같다”고 말했다.

나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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