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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이 살아났다, 문화와 재미를 얹어봤더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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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호 12면

① 골목을 따라 점포가 늘어선 수원 못골시장. ② 시장 손님을 위해 새로 마련한 휴식공간. 수유실도 있다. ③ 주 2회 라디오 생방송을 진행하는 DJ박스. ④ 못골시장 입구. 신인섭 기자

“자 떡들 들여가세요, 한 팩에 2000원짜리 세 팩에 5000원!”
“메밀묵이요, 메밀묵-.”
“취나물 나왔습니다. 무쳐 먹기 좋아요. 상추는 한 바구니 1000원에 드려요.”

수원 못골시장 ‘문전성시 프로젝트’ 성공스토리

그늘막으로 땡볕을 가린 골목에 들어서자 상인들의 목소리가 리듬처럼 깔린다. 약속이나 한 듯 귀에 거슬리지 않을 만큼의 중저음이 일정하다. 소리도 소리지만 시장의 제맛은 눈으로 봐야 난다. 가게마다 늘어놓은 야채·생선·정육·건어물·한약재 등 식재료와 각종 반찬·만두·순대·뻥튀기 등 먹을거리에 군침이 돈다. 진열 방식도 원산지·가격표시도 꽤 꼼꼼하다.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못골시장 풍경이다. 중앙SUNDAY가 여기를 찾은 11일, 한낮의 시장에는 생기가 흘렀다. 대형마트 등에 밀려 재래시장이 위기라는 걱정을, 적어도 여기서는 잠시 잊을 만했다.

사실 겉보기에는 유별날 게 없는 동네 시장이다. 대형 상가 건물이 아니라 200m가 못 되는 골목에 식품을 위주로 의류·화장품·신발 등 87개 점포가 늘어선 작은 규모다. 그런데 작은 고추가 맵다고, 이 시장은 최근 재미있는 일을 여럿 벌였다. 주 2회 한 시간씩 상인들이 DJ를 맡아 진행하는 라디오 생방송, 이른바 ‘못골 온에어’가 대표적이다. 음악과 함께 생생한 시장 소식을 전해 인기가 높다. ‘못골 줌마 불평 합창단’ 역시 4월 창단무대 이후 벌써 외부에서 공연 요청을 받을 만큼 인기다. ‘줌마’에서 짐작하듯 상인 15명·주민 3명 등 단원 모두 여성이다. ‘불평’을 내세운 대로, 노랫말이 진솔하다. ‘눌러보고 만져만 보고/그냥 가면 섭섭해요’ ‘백화점은 왜 안 물어봐/재래시장만 깎자고 하지요’ 등 ‘못골 CM송’ 가사는 상인들이 적어낸 글에서 따왔다.

“매주 한 번 모여 두 시간 노래를 부르고 나면 일주일이 짧아요. 스트레스도 풀고 재미나요. 활력소이자 보약이죠. (노래를 잘) 못해도 (합창단으로) 써주는 그 자체, 불평을 들어주는 그 자체가 고맙죠.” 단원 윤미자(47·폐백음식 전문점 ‘규수당’)씨의 말이다.

못골시장의 이런 다양한 시도가 시작된 건 1년 전이다. 문화를 통해 시장을 활성화하는 문화부의 시범사업, 이른바 ‘문전성시 프로젝트’에 지난해 이맘때 강원도 주문진 시장과 나란히 선정됐다. 이후 각 분야 전문가들과 상인들의 거듭된 논의를 거쳐 각양각색 활동을 폈다. 농촌마을과 연계해 동지팥죽·대보름나물 같은 음식축제를 열었는가 하면, 1만원 한도로 시장에서 산 재료로 음식을 만드는 요리교실도 진행했다. 가까운 초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방과후 시장 체험을 통한 경제교육도 해봤다. 교사 역할은 물론 상인들이 맡았다.

이런 활동은 언론 보도 등 꾸준히 화제가 됐다. 덩달아 시장을 찾는 사람도 늘었다. 상인회 회장 김상욱(42·동성분식)씨는 “지난달 조사해 보니 하루 평균 1만1000명선”이라고 전한다. 그에 따르면 2005년 조사의 5000여 명은 물론이고, 지난해 1만 명보다도 많아진 것이다. “사람이 많아지면 매출도 늘게 마련”이라며 “평균을 내기는 힘들지만 가게마다 10~30%쯤 늘었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운이 좋아 지원을 많이 받았다”고 운을 뗐지만, 상인들의 지속적인 노력이 있었음을 강조했다. 2004년 재래시장 육성 특별법이 제정된 이후, 중소기업청의 마케팅 지원·교육지원 사업 등에 기회가 닿을 때마다 참여한 것이 그 예다. 종업원을 따로 두면 모를까, 혼자 혹은 주인 내외가 번갈아 손님을 맞는 시장 상인들로는 쉽지 않은 일이다. 할인·경품·쿠폰 등도 일찌감치 시도했다. 그가 “상인들의 결집력”을 강조하는 것은 이 모든 경험이 바탕이다. “시장이 발전하려면 상인들 간의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일을 하다 보면 비판도 있고, 반대하는 사람도 나오죠. 정서적으로 소통이 돼야 그 바탕에서 일을 추진할 수 있어요.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각자 ‘내 장사’가 바빠서 서로 신경을 못 쓰거든요.” 그는 홍보효과와 더불어 “상인들의 마인드가 업그레이드 된 것”을 문전성시 프로젝트의 가장 큰 성과로 꼽았다.

김 회장은 다른 사업을 하다 IMF 외환위기 무렵 큰 실패를 경험했다. 처가가 못골시장에서 하던 분식집 앞에서 과일을 팔면서 재기를 시작했다. 2003년 상인회가 결성되자 총무를 맡았고, 이후 2년 임기의 회장을 세 번째 연임하고 있다. 장기집권비결을 물었더니,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의 명 대사를 인용한다. “뭘 많이 먹여야죠. 딱딱한 사안 갖고는 안 모여요. 송년회든 야유회든 잘 차려놓고 모여서 서로를 알아가게 해야죠.” 그는 특히 시장과 문화의 결합에 대해 “시장과 함께 가는 문화, 시장을 기능적으로 활성화하는 문화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시장이 문화 ·예술작업에 무대를 제공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시각이다.

못골시장은 겉모습도 좀 달라진다. 중기청의 지원을 받아 골목에 투명 지붕을 씌우는 아케이드 공사가 예정돼 있다. 이 과정에서 문전성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간판을 꾸미는 등 디자인 작업도 구상 중이다.

그 사이 못골시장 상인 중에는 매출이 줄어든 이도 있다. ‘못골 온에어’ DJ 3인방 중 한 사람인 김승일(32·분식점 ‘쉼터’)씨 경우다. 상인회 일이 바빠지면서 메뉴를 줄이고, 종업원을 두지 않는 등 장사 규모를 줄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시장 전체로는 플러스”라는 게 그의 말이다. 김씨는 어려서부터 못골시장에서 컸다. 시장 가까이에서 식당을 운영했던 부모의 뒤를 이어, 여기서 야채장사를 시작했다. 남달리 애정이 큰 만큼 아이디어도 많다. “화성 같은 문화재와 다른 시장들을 연계해 관광코스로 개발하기도 좋다”고 의견을 들려준다. 못골시장이 자리한 팔달문 일대는 각종 시장이 9개나 있는 수원의 중심 상권이다. 특히 그릇 등 잡화가 전문인 영동시장은 주차장을 사이에 두고 못골시장 바로 맞은편에, 순대로 이름난 지동시장은 옆에 있다. 못골시장은 이 중 규모로는 막내뻘이지만 최근 유명세를 타면서 다른 시장 나들이 길에도 거쳐가는 곳이 됐다.

상인 중에 젊은 편인 김씨 역시 지난 1년의 가장 큰 성과로 “상인들의 마음이 열린 것”을 꼽는다. “전에는 리서치다, 설문조사다 하면 거부하는 분들이 있었어요. 지금은 반가워들 해주시죠.” 그는 문전성시 프로젝트의 여러 프로그램을 비롯한 외부의 지원을 “차려진 밥상”에 비유했다. 얼마나 혹은 어떻게 먹느냐는 각 상인들에게 달렸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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