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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삼칼럼]국정에 신호등이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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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겁니까. " 요즘 지난 80년대 초처럼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부쩍 많아졌다.사회불안이 점증하고 있다는 증거다.

6.25이후 최대의 국난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작금의 경제위기 속에서 불안감을 지니는 건 당연한 게 아니냐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요즘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자리잡고 있는 불안감은 단지 그런 객관적인 경제여건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외환요인 이외에도 마치 신호등이 고장난 교차로에 멈춰 서있을 때 느끼는 당황감과 불안감이 중첩해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이 '준비된 대통령' 이라는 건 다수의 국민들이 인정하고 있다.

또 金대통령은 카리스마가 강하다고 비판받았으면 받았지 리더십이 없다는 비난을 받을 인물은 아니다.그런데 왜 국민들은 요즘 정부의 시책에 갈피를 못잡고 있는 것인가.

이 점은 현정권 담당자들이 겸허히 가슴을 열고 여러 측면에서 깊이 따져보아야 할 사항이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이란 세계적 베스트셀러를 썼던 스티븐 코비는 리더의 역할을 다음 세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첫째가 방향찾기 (pathfinding) , 둘째가 한 방향으로 정렬 (aligning) , 셋째가 권한부여 (empowering) 다.

'방향찾기' 는 리더가 그 자신이 지니고 있는 비전과 가치체계를 제시해 주는 것이다. '한 방향으로 정렬' 은 조직의 구조.시스템, 그리고 운영과정이 리더 자신의 비전과 사명에 어긋나지 않을 뿐 아니라 조직의 구조와 시스템이 서로 충돌하거나 경쟁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권한부여' 는 앞의 두가지를 전제로 조직원들의 잠재능력과 창의성이 깨어나도록 유도하는 것을 말한다. 코비의 용어에 따르자면 IMF사태 이후 우리 사회는 '방향찾기' 에는 어느 정도 성공했다.

우선 경제위기의 근본원인은 어느 정책당국자나 정권담당자의 일시적 실수나 무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이루어진 누적적.구조적인 것이라는 데 모두들 동의했다. 이에 따라 이번 기회에 일시적인 고통이 따르더라도 대수술이 불가피하다는데 국민적 합의를 이뤘다.

이는 IMF 등 외부의 요구이기도 했지만 실은 우리 사회내부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문제제기를 해왔던 터라 쉽게 사회적 합의가 이뤄질 수 있었다. 돌이켜 보면 대선이후 3개월동안 우리 사회는 그 엄청난 경제적 위기속에서도 오히려 지금보다도 더 안정되고 정돈된 분위기를 유지했다.

그것은 절약과 수출로 위기를 극복하자는 '방향찾기' 와 '한 방향으로 정렬' , 그리고 잠재적 능력을 드러내는 '권한부여' 가 그 석달동안에는 순차적으로 진행됐기 때문이다. 금 모으기운동이 그때의 사회분위기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즈막에 와서는 왜 그런 분위기가 사라져버렸을까. 소득이 다시 늘어서? 천만에 - .기업경영은 더 나빠졌으면 나빠졌지 나아진 건 없고 봉급생활자들도 그때 깎인 봉급 그대로다.

가장 큰 문제는 '한 방향으로 정렬' 이 안되고 있는 점에 있는 것 같다. 발등에 불인 구조조정만 해도 정부기관마다, 정부당국자마다 뉘앙스가 전혀 다른 발언들을 마구 해대고 있다.

또 한번 했던 말도 여차하면 스스로 뒤집어버리는 일이 다반사다. 그런가 하면 정리해고에 관한 문제처럼 정리해고를 하라는 말인지, 하지 말라는 말인지 가늠할 수 없게 서로 상치되는 발언이 한 정부내에서 나오고 있다.

이렇게 되면 잠재력이 발현되는 '권한부여' 를 기대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애써 확보한 '방향찾기' 마저 흔들리게 마련이다. 아니 이미 흔들렸다.

바로 이것이 요즘 불안이 점증하는 요인이라고 본다.

이렇듯 정부의 리더십이 흔들린 요인으로는 몇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는 갈래가 많은 행정기관과 기구를 지휘하고 계통을 세울 시스템이 없는 점이다. 정책구상도, 집행도 각개약진 (各個躍進) 식이니 정렬이 될리 없다.

둘째는 여론에 너무 민감하다. 지자체 선거를 앞둔 탓인지 누구에게도 욕을 안먹으려 하고 있다.

그러니 여론이 나빠지면 발언 수정을 다반사로 하게 된다. 이는 행정을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한다고도 해석할 수 있지만 신념이 없이 나약하다고도 평할 수 있다.

정치도, 행정도 종국적으로는 선택이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정치나 행정이란 있을 수 없다.

분명한 선택과 일부의 반발을 각오하는 일관성을 보일 때 불편은 증가해도 장래에 대한 불안감은 감소할 것이다. 지금의 국정엔 신호등이 없다는 느낌이다.

유승삼 중앙M&B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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