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량기업 대출금 경감 의미·문제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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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은행을 통한 부실기업정리가 정부정책으로 공식화됐다. 그동안 간사은행인 상업은행이 '논의' 차원에서 거론하던 것이 금융감독위원회가 14일 이를 국회에 업무보고함에 따라 정책으로 굳어진 것이다.

이날 보고과정에서 은행의 기업부실판정위원회는 부실기업 퇴출보다는 살 수 있는 기업을 빨리 살리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 특히 부각됐다.그 수단으로 구조조정을 통해 회생가능성이 있다고 판정되는 기업에 대해 금감위는 대출금의 원리금상환을 유예해 주거나 아예 원리금을 깎아주기로 했다.

금감위는 구조조정을 촉진하기 위해 원리금 상환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목적이라고 밝혔다.

또 외국투자자들에게 기업을 팔기 위해서도 빚을 탕감해줄 필요가 있다고 설명한다. 이에 대해서는 은행들도 완전히 떼이는 것보다 빚을 깎아줘 일부라도 받아내는 것이 상대적으로 유리하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방안은 자칫 형평 문제를 야기할 위험도 안고 있다. 정상적인 A급 기업은 고금리를 다 물어가면서 빚을 갚아야 하는데 부실화돼 구조조정을 해야 하는 B급 기업들은 빚을 탕감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아예 퇴출 대상인 C급기업과 도와주면서 살리게 될 B급과의 문제는 더욱 심각한 분란의 소지를 안고 있다. 중소기업과의 형평성 문제도 뺄 수 없다.

또 빚탕감은 기업주들에게 대출금 일부를 안 갚아도 된다는 일종의 도덕적 해이를 일으킬 수 있다는 점도 지적되고 있다. 부실화된 뒤에는 대출금을 많이 지니고 있는 것이 은행들과의 탕감협상에서 유리해지기 때문이다.

H은행 융자부 관계자는 "대출금의 많고 적음에 따라 기업이 은행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지는데 처음부터 빚탕감을 전제로 하면 은행의 손실만 커진다" 고 말했다. 그러나 금감위나 은행은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금감위가 부실기업정리를 빨리 하라고 은행을 다그치기가 어려운 점도 있다. 금감위는 사실상 파산상태에 있는 기업은 은행책임하에 과감히 청산.정리하라고 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잠재부실' 이 '확정부실' 로 바뀌면서 은행의 국제결제은행 (BIS) 자기자본비율이 뚝 떨어지게 된다. 이 때문에 은행들은 부실기업인줄 뻔히 알면서도 손을 대기 어려운 점이 있다.

그래서 정부 눈치를 살피는 것이다.

정부는 이처럼 퇴출을 의도적으로 막는 은행들도 제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지만 BIS비율이 사활의 잣대가 되고 있는 현실에서 은행들만 나무라기도 쉽잖은 게 현실이다.

또 은행에만 맡겨두기에는 시간도 없다. 은행끼리 기준을 맞추지 못해 갈팡질팡하고 있다.

갑자기 정부가 하라니까 우르르 몰려다니며 시늉을 내고는 있으나 이러다가는 흐지부지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정부는 자율이라는 형식논리에 매달려 은행 뒤에 숨으려고만 하고 있다.

살릴 기업과 버릴 기업을 가르고 살릴 기업에 힘을 집중한다는 원칙은 옳다. 따라서 이미 금감위가 국회에서 정책방향을 밝힌 이상 꾸물거릴 필요없이 '분명한 잣대' 를 만들어 주도적으로 일을 추진해야한다는 지적이다.

남윤호 기자 〈yhn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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