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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48> 언 강의 겨울 낚시 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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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사람들은 한평생 같은 동화를 세 번 읽는다고 한다. 한 번은 어려서 어머니가 읽어주는 동화이고 두 번째는 자기가 아이들에게 들려주려고 읽는 동화다. 그런데 마지막 세 번째는 늙어서 자기 자신의 추억을 위해서 다시 읽는 동화다. 첫 번째는 배우는 동화, 두 번째는 가르치는 동화, 세 번째에 와서 비로소 그 동화는 생각하는 동화가 되는 것이다. 동화뿐인가. 모든 삶의 이야기는 이와 같은 세 가지 단계로 끝이 나는 법이다.

문제는 일생 동안 세 번씩이나 듣고 읽을 만한 행복한 동화(동요)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일제 식민지 학교에서 자란 아이들이 갖고 있는 ‘파랑새’ 이야기다. 내가 맨 먼저 들은 파랑새는 “새야 새야 파랑새야”의 그 민요였다. 그다음 파랑새는 총독부 교과서에 실린 기타하라 하쿠슈(北原白秋)의 동시 ‘아카이 도리 고토리(赤い鳥小鳥)’ 속에 등장한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내가 스스로 찾아 읽은 마테를링크의 동극(童劇) ‘파랑새’다. 국적도 다 다르고 양식도 동화가 아닌 민요와 창작 동요와 동극이었지만 이 세 가지 파랑새는 어느 동화보다도 내 머릿속에 강렬하게 찍혀 있다. 제 아무리 크고 강한 나라에 태어난 행복한 아이라도 나처럼 한·일(韓·日)과 서양의 세 파랑새 이야기를 글로벌하게 간직하며 자란 경우란 없을 것이다.

내가 맨 처음 만난 파랑새는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전래 민요로서 자장가로도 불렀다 하니 어쩌면 나는 강보에 싸여 있을 때부터 들어왔을지도 모른다. 동네 아이들은 슬플 때나 즐거울 때나 그 민요를 자주 불렀지만 나에게는 울고 가는 청포장수나 사사조(四四調)의 느린 가락이나 모두가 구슬프게 들렸다. 콩밭은 알아도 녹두밭은 모르고 도토리묵은 알아도 청포묵은 몰랐던 아이. 더구나 녹두를 갈아 청포묵을 쑨다는 것을 알지 못해 왜 녹두밭에 파랑새가 앉으면 청포장수가 울고 가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아이. 그리고 또 파랑새가 어떻게 생겼는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아이는 그냥 논에 앉는 참새들처럼 상상 속의 파랑새를 쫓아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게 혼자 생각한 것이 아니라 알게 모르게 그 노래는 내 머리에 그런 못을 박았다. 더 큰 못이 박혔었더라면 그 파랑새를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 파랑새는 치루치루와 미치루(일본어로 번역된 책에는 ‘칠칠’과 ‘미칠’이 그렇게 표기되어 있었다)가 찾아다닌 행복의 ‘파랑새’와는 정반대였다. 하나는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서 끝없이 쫓아다녀야 할 파랑새이고 또 하나는 우리의 불행을 막기 위해서 우리에게 다가와 앉지 못하도록 쫓아내야만 하는 파랑새였다. 녹두꽃이 지고 청포장수가 울고 가는 불행한 풍경, 슬픈 이야기에서는 미움과 부정의 힘이 생산된다.

그리고 마테를링크의 파랑새는 기억의 나라, 밤의 나라, 숲과 행복과 미래의 나라를 차례차례 순례하면서 먼 나라 낯선 나라들을 찾아 모험을 한다. 그러다가 집에 돌아와 보니 처마 밑 새장 안의 비둘기가 바로 자기네들이 찾아다녔던 파랑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떠날 때는 몰랐는데도 자기 집 새가 더 파랗게 변해 있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집에서 멀리 떠나면 떠날수록 현실에서 먼 꿈을 꿀수록 가까이에 다가오는 행복의 새 그리고 그것이 칠칠과 미칠 그리고 병든 이웃소녀를 행복하게 하는 긍정의 힘을 낳는다. 그래서 이 두 파랑새는 역사를 움직이는 부정과 긍정의 두 둥지를 내 가슴에 틀었다.

그런데 불행과 행복의 파랑새의 텍스트 읽기는 세 번이 아니라 여러 번 변하게 된다. 어른들은 녹두밭은 그냥 녹두밭이 아니라 동학군을 뜻하는 것이라고 했다. 전봉준(全琫準)은 어릴 때 몸집이 작아 녹두라는 별명이 붙어서 녹두장군이라고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청포장수는 동학군에 의지하고 살아가는 민중이라고 했다. 물론 녹두꽃을 떨어뜨리는 파랑새는 동학군을 멸하는 푸른 제복의 일본군이다. 그런데 어디에서 들었는지 다른 아이들은 전봉준의 성 전(全)자에는 팔(八)과 왕(王)자가 들어 있어서 팔왕이라고 읽혀진다며 그래서 파랑새는 팔왕의 전봉준이 된다는 것이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너는 어이 널라왔니/ 솔잎댓잎 푸릇푸릇 봄철인가 널라왔지”의 가사는 시대를 잘못 알고 거사를 했다 실패한 전봉준을 한탄하는 내용이라는 것이었다. 일본군이 되었다가 일순간에 녹두장군이 되는 파랑새. 이 현기증에 또 하나의 일본 텍스트 기타하라 하쿠슈의 동시 ‘파랑새’를 읽지 않으면 안 된다.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

※ 다음 회 제목은 ‘파랑새 작은새 어째어째 파랗지’입니다. joins.com/leeo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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