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TV 뻬끼기]중.표절은 구조적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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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백지에 아이디어를 그리는 것과 일본 프로를 보고 따라하는 것을 비교해 보십시오. 어느 게 더 쉽겠습니까. " 한 PD의 말이다. 프로그램을 만드는 입장에서 외국의 인기 프로를 베끼면 한결 간단한 건 상식이다.

이미 검증이 돼있고 그것을 우리 현실에 맞게 조금만 손질하면 어느 정도의 시청률을 확보할 수 있다.

반면 자체 아이디어를 채택할 경우 실패할 가능성도 커지고 이에 따른 정신적 고통도 심해진다. "오랫동안 고민해 새로운 프로를 개발했습니다. 방송이 전파를 타자 몇가지 문제점이 나타났습니다. 처음 하는 것이니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했지만 윗사람들의 반응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조기 하차해야 했습니다. " 어느 PD의 고백이다.

또다른 PD는 "첫 방송이 나가자마자 '그만 두라' 고 얘기하는 경우까지 있다" 고 밝혔다.

프로그램 편성권을 쥔 간부들이 창의성보다 시청률만을 생각하는 것에서 일단 표절의 기본 토양이 마련된 셈이다.

여기에 제작진의 참신한 아이디어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제작 환경이 더해진다.

"몇년을 이끌어야 할 프로그램 준비기간이 15일이라는 게 말이 됩니까. 더군다나 평소 관심도 없던 프로를 갑자기 맡기며 만들라고 하면 무슨 아이디어가 나오겠습니까. " 한 PD는 전근대적인 방송 풍토를 비판하며 아이디어가 샘솟는 젊은 PD들을 일본 베끼기 풍토에 자연스럽게 물들게 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표절에 대한 제어장치가 없는 것도 큰 문제다.

방송사의 자율적 규제를 기대할 수 없는 건 물론이다. "방송사가 표절을 조장하고 있는 분위기인데 자체 심의를 할 리가 있습니까. " 한 PD의 고백이다.

여기에 방송위원회도 방관하고 있는 형편이다.

현재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 제60조에는 "방송은 타 작품을 표절하거나 현저하게 모방해서는 안된다" 는 '모방금지' 조항이 들어있다.

그러나 이 규정에 의해 징계가 내려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방송위원회측의 말. "심의를 통해 징계하려면 증거자료가 있어야 하는데 일본 테이프를 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표절 작품이라는 얘기를 들어도 테이프를 못구해 심의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 하지만 방송국 PD들은 그리 어렵지 않게 일본 테이프를 입수하고 있다.

일본 유학생 등에게 PD나 작가들이 개인적으로 복사를 부탁하기도 하고 회사 차원에서 일본 프로들을 관리하기도 한다.

방송위원회라면 일본 방송국에 직접 요청해도 어렵지 않게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金재범 교수는 "방송국측이 자체심의 등을 통해 개선하는 것이 창작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측면에서도 바람직하겠지만 그것이 안되고 있는 만큼 방송위원회의 심의를 통한 외부적 규제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본다" 고 주장한다.

방송사 제작진에 팽배해 있는 "일본 프로 형식을 가지고 와도 우리 식으로 손질하면 무방하다" 는 의식도 표절 관행을 뿌리뽑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실제로 많은 PD들이 "일본 프로에서 형식을 차용하는 게 뭐가 나쁘냐" 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전문가의 견해는 다르다. 金교수는 "방송 프로는 엄연한 창작물인데 다른 사람의 작품을 도용하는 것은 무책임한 발상" 이라며 "일본 방송사에서 법적 문제를 제기해 온다면 많은 프로들에 저작권 침해 결정이 내려질 것" 이라고 말했다.

강주안.정용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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