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일본TV 베끼기]상.일본 프로가 교과서…어느 PD의 고백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몇년 전, 개편을 15일쯤 앞두고 고위 간부로부터 일본 프로가 녹화된 테이프를 받았다. PD들이 모여 비디오를 본 뒤 서로 베낄 부분을 할당했다.

'저 여자 역할을 누구에게 맡길까' '저 세트는 어떻게 만들까' 등을 고민하며 분주하게 준비했다.

일본 비디오를 놓고 똑같이 만드는 것이 기분 좋을 리는 없다. 그러나 출연자를 섭외하고 세트를 꾸미다 보면 15일이라는 시간은 그대로 옮겨놓기에도 빡빡한 시간이다.

정신없이 일을 하다보면 죄책감 같은 것은 어느새 사라진다.

"남들도 다 베끼는데…. " 하지만 소품까지 그대로 준비하라는 말에는 화가 났다. 우리 실정과는 안맞는 소품이었다. 그래도 별 도리가 없었다.

프로가 방영됐다. 예상대로 반응이 괜찮았다.

일단 기분은 좋았다. 장수 프로가 돼 더욱 기뻤다.문제는 일본에서 손님이 올 때였다. 그 사람들 앞에 서면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개편 때마다 각 방송사들은 새 포맷.새 아이디어로 꾸민 프로들을 내놓는다. 나는 이런 것들이 대부분 모방된 프로라고 본다. 또 그런 예상은 대개 사실로 드러난다.

이것 저것 조금씩 바꾸려는 시도를 안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본 방송사들이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얻어낸 '정답' 을 뻔히 보면서 억지로 다르게 하다보면 꼭 그 부분에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나중엔 바꾸려는 노력조차 포기하게 된다.

게다가 베끼기를 좋아하는 분이 높은 자리에 오면 조직적으로 테이프를 수집하고 그걸 다시 제작진에 건네며 베끼도록 하는 일들이 반복된다. PD나 작가 개인 차원의 표절도 계속된다. 요즘 통합방송법 제정을 앞두고 방송사마다 공영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나는 앞으로도 일본 베끼기가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본과의 교류가 많아질 것을 생각하면 창피한 일이 아닐 수 없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