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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L기 실종 때 북 소행 직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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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한국의 민주화 격동기였던 1986년부터 89년까지 주한 미국대사를 지낸 제임스 릴리 전 대사는 87년 6월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민주화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계엄을 선포하려 할 때 미국이 막았다고 밝혔다. 또 북한은 88 서울올림픽의 공동 개최를 요구하다 여의치 않자 KAL 858기를 폭파했으며 레이건 대통령이 소련 측에 북한이 88 올림픽에서 테러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약속을 얻어냈었다고 회고했다.

릴리 전 대사는 기자인 아들 제프리와 함께 저술한 '중국의 손길:아시아에서 90년간의 모험.첩보.외교 (China Hands:Nine Decades of Adventure, Espionage and Diplomacy in Asia)'라는 회고록에서 이같이 밝혔다. 다음은 릴리가 밝힌 격동기 한국 정치의 비사다.

◇미국이 계엄 막았다=87년 4월 전두환 대통령은 88 올림픽이 끝날 때까지 헌법 개정 논의 중단을 선언했다. 이는 차기 대통령이 선거인단에 의해 (간접선거로) 뽑힌다는 걸 의미했다. 시위는 탄력을 얻고 정치적인 분위기는 달아올랐다. 서울시청에 20만~30만명의 시위대가 운집했다. 6월 17일 나는 대사관 해리 던롭 정무참사관의 전화를 받았다. 레이건 대통령이 전두환 대통령에게 보내는 친서가 도착하니 내가 청와대를 방문하는 것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친서는 전 대통령의 민주화 시위 진압을 막으려는 통합된 전략의 하나였다.

한국 정부는 처음엔 시간 약속을 해 주지 않았다. 전 대통령이 이미 무력 사용을 결정했다는 의미로도 해석됐다. 던롭은 한국 정부 관계자와의 전화에서 "전 대통령이 주미대사를 안 만난다는 결정을 했다고 믿을 수 없다. 그런 결정을 한 사람의 이름을 대라"고 고함을 쳤다.

최광수 외무부 장관은 나에게 전화해 6월 19일 전 대통령을 만날 수 있다고 했다. 전 대통령은 나를 만나는 90분간 돌처럼 굳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는 친서를 읽었다. 정치범 석방과 권력 남용을 한 경찰관 처벌, 언론 자유 등의 추가 조치를 권고하는 내용이었다. 나는 계엄 선포를 반대하는 미국의 입장을 확고하고 분명하게 전달했다. 계엄은 한.미동맹을 훼손할 것이며 80년 광주사태의 재발을 초래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날 오후 최 장관은 대통령이 계엄을 포기했다고 전화로 알려줬다.

◇KAL기 폭파는 북한 공작=서울이 88 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된 뒤 북한은 올림픽 공동 개최를 요구하며 한국과 협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협상의 배후에서는 양보를 얻어내려고 공격을 계획했다. 87년 11월 29일 대한항공 여객기가 안다만해 상공에서 실종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북한의 소행이라는 걸 알았다. 그때 혼잣말로 "무서운 짓이다. 사건의 진상을 규명해 북한에 타격을 주자"고 말했다.

11월 31일 바레인 공항에서 KAL 858기 폭파 용의자 두 사람이 경찰에 체포됐다. 북한 공작원인 노인은 청산가리가 든 담배를 물고 즉사했다. 그러나 젊은 여성은 한순간 망설였다. 바레인 경찰서장인 이안 헨더슨은 그녀(김현희)의 입에 있던 담배를 손으로 쳐서 날려 자살을 막았다. 영국 태생인 헨더슨의 손가락에는 그때 김현희가 물어서 생긴 상처가 남아 있다. 김현희를 한국으로 데려가는 임무를 맡은 것은 박수길 외무부 차관이었다. 그는 빨리 김현희를 넘기라고 바레인 측을 설득했다. 북한에 구출공작을 펼 시간을 주면 바레인 사람들도 살해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김현희는 대통령 선거 며칠 전에 서울에 도착했다. 이는 야당 후보들보다 여당의 노태우 후보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김현희의 서울 도착으로 노 후보가 최소한 150만표를 더 얻었다고 노 후보의 고위 보좌관이 나중에 박 차관에게 말했다.

이 사건으로 미국은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 포함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88년 3월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에게서 올림픽 때 북한의 테러공격이 없을 것이라는 보장을 얻어냈다.

워싱턴=김종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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