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소보원의 눈치보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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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공인 (公人) 들에게 소신있는 책임행정을 기대하는 것은 아직도 서민들의 '희망사항' 에 불과한 것인가.

최근 아파트 중도금 대출금리 인상을 둘러싼 소비자와 주택할부금융사간의 분쟁을 두고 관련 기관들의 태도를 보면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27일 소보원 분쟁조정위에서는 주택할부금융사들이 시중금리인상을 이유로 고정금리 약정을 깨뜨리고 아파트 중도금 대출금리를 인상한 것에 대해 조정결정을 내리기로 했었다.

소보원은 이미 2주일전 이 안건을 심의, 조정위원들의 찬반을 거치고 법리적 검토끝에 "할부금융사들이 여신거래약관상 경제위기에 따른 금리변동을 내세워 이자를 올렸지만 고정금리를 약정한 이상 약관규제법률에 따라 금리인상이 부당하다" 는 결정문까지 작성, 요식적인 절차만 남겨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이날 오후 조정위원들은 할부금융 관련피해 15건을 함게 처리하겠다는 이유로 갑작스럽게 조정결정을 연기했다.

속사정은 이 결정으로 할부금융사의 피해가 2천7백억원에 상당하게 돼 존폐가 우려될 정도여서 공정거래위보다 결정을 먼저 내린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는것. '2주후에도 마찬가지' 라며 반대하는 일부 위원들의 목소리도 눈치보기 (?) 대세 속에 수그러들고 말았다는 것이다.

같은 안건으로 할부금융사의 공정거래법 위반여부를 심판하기 위해 열린 다음날 공정거래위원회도 심사관의 법적 결정이 내려진 상태였으나 사업자측 변호인단의 의견을 듣고는 특별한 이유없이 결정을 연기했다.

현재 고정금리를 명시한뒤 대출금리를 중도인상한 할부금융사에서 대출받은 서민은 11만여명으로 금액은 4조6천4백40억원에 달한다.

이날 결정이 연기됐다는 소식에 소보원에 피해접수를 한 김모 (36) 씨는 "사회지도층인 조정위원들이 서민들만 이용하는 할부금융사 금리인상의 피해와 시급성을 알겠느냐" 며 분통을 터뜨렸다.

결국 기관들의 눈치보기로 11만 서민들은 또다시 2주일을 연 35%의 높은 연체료를 물면서 기다려야 할 지경이 됐다.

물론 이런 중대한 결정을 성급히 내릴 필요는 없다.

하지만 결정문까지 작성한 상태에서 별 이유없이 연기한것은 우리사회 공인들에 만연한 책임 회피성 눈치보기 행정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김태진 생활과학부 기자〈tj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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