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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삼칼럼]다이애나가 남긴 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장마비가 쏟아지는 어느 날 한 여인이 갓난아기를 품에 안은 채 온 몸에 비를 맞으며 육교 위에서 동전통을 놓고 구걸하고 있다. 빗줄기는 갓난아기에게까지 마구 들이쳐 발걸음을 저절로 멈추게 한다' .이런 광경과 맞닥뜨렸을 때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앵벌이꾼들이 연극을 하고 있는 것이다. 모른 척하고 지나치는 게 낫다. 동정하면 앵벌이를 조장하게 된다. " "그렇다고 비 맞는 갓난아기를 빤히 보면서도 지나쳐 버린다는 건 인간으로서의 도리가 아니다. 우선은 도움을 줘야 한다. 앵벌이를 해야할 만큼 절박한 건 사실 아닌가. "

"특정 개인에 대한 우연한 동정으로는 문제가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근본적 해결을 위한 제도마련을 위해 안됐지만 딱한 광경을 방치해 국민들이 사회모순을 직시하게 해야 한다. "

학생때 친구들과 이런 논지들로 옥신각신하던 기억이 새롭다. 나는 당시 맨 마지막 주장을 하는 쪽에 속했다. 그런데 요즘엔 생각이 두번째의 것에 가깝게 바뀌었다. 물론 아직도 기존생각을 송두리째 바꾼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때로부터 30여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육교 위의 풍경은 그냥 그대로인 현실을 보면서 여전히 그들을 구조개선의 도구로 삼을 용기는 더 이상 없다. 단 한번의 삶을 사는 사람의 불행을 문제해결의 수단으로 삼으려는 것은 너무 비정한 생각이었다는 반성도 한다.

자선이나 기부가 제도나 법에 근거한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그러나 선진사회일수록 그것은 제도에 못지않은 힘을 지닌 사회적 관행으로 굳건히 자리잡고 있어 제도의 허점이나 취약점을 보완해주는 역할을 한다. 선진국 가운데서도 미국은 자선이나 기부행위의 사회적 비중이 큰 나라로 꼽힌다.

지난 96년 미국인의 기부금 총액은 1천2백억달러에 달했다. 그래서 미국은 사회복지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유럽국가들로부터 복지를 개인의 동정심에 의존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다.

그러면 우리나라는 유럽쪽인가, 미국쪽인가. 우리 사회는 그 어느 쪽도 아니다. 한마디로 복지도, 자선도 없는 약육강식의 정글일 뿐이다. 우리나라의 복지예산은 소득수준에 비해 터무니없이 낮아 선진국 문턱에 들어섰다고 으스대던 지난해에도 그 수준이 태국.이집트.말레이시아에도 미치지 못했다.

우리 사회의 전체 자선금 및 기부금에 관해서는 공식적인 통계가 없으나 지난 96년 법인세신고 법인들이 낸 기부금이 2조3백23억원으로 집계되고 있다. 미국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이고 그나마 기부금 중 상당액이 자신들이 만든 재단에 대한 출연금이다.

이렇게 제도적 복지도, 자선도 미미한데 우리 국민들은 '양들의 침묵' 인 양 조용하고 다소곳하기만 하다. 다른 나라에서 요즘 우리 사회처럼 실업이 급증했다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

정치적 세뇌로 우리 사회구성원들의 머리속에는 복지관념이 아예 없는 탓이다. 있다면 오히려 '복지란 사치한 생각' 이 복지에 대한 기대보다 더 강할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약자들의 이런 침묵을 다행스럽게 여길 일은 결코 아니다. 그런 무지와 침묵이 과연 얼마나 갈 것인가. 언젠가는 걷잡을 수 없는 반발로 폭발하지 않겠는가. 또 경제적 효율성만 추구해 경제가 어느 정도 회복된다 한들 인간적인 유대가 모두 상실된 정글의 사회가 된다면 문제를 해결한 게 아니라 더 큰 문제를 만드는 셈일 것이다.

사회보장제가 발달해 있는 유럽에서는 요즘 경기가 나빠지고 실업자가 늘어나자 이를 돕기 위한 자원봉사자와 조직이 급증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이에 비해 우리의 경우는 국제통화기금 (IMF) 한파가 닥친 이후 각 단체에 대한 후원금이나 기부금이 크게 줄었고 교회나 성당.사찰 등에 신자는 느는데도 헌금은 줄어드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다이애나 전 영국왕세자비가 숨졌을 때 워싱턴 포스트 명예회장인 캐서린 그레이엄 여사가 워싱턴 포스트에 쓴 추모 특별기고 가운데 잊혀지지 않는 감동적인 대목이 있다. 언젠가 둘이서 테니스를 치고 돌아가는 차 속에서 다이애나는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나는 내 사랑하는 두 아들이 세상엔 왕족만이 아니라 고통받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자라기를 바란다."

유승삼 〈중앙 M&B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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