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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다임의 전환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17호 34면

‘패러다임(paradigm)’이라는 말만큼 우리땅에서 꾸준히 사랑 받는 말도 없다. 구글을 검색해 보면 지난 한 달간 패러다임은 뉴스매체에서 1000회 이상 사용됐다. 대충 이런 식으로 쓰이고 있다. “녹색성장의 패러다임을 정립하는 것이 시급하다.” “이명박 정부의 지난 1년 정책은 경제의 패러다임을 바꾸기 위한 첫 단계로서 이를 비판하는…” “이러한 관점은 오늘날 현대 의학의 패러다임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김환영 칼럼

‘모럴 해저드(moral hazard)’나 ‘문명 충돌’ 같은 말도 한동안 크게 유행했으나 생명력은 패러다임에 훨씬 떨어진다. 패러다임이라는 말이 이 땅에 들어온 지도 40여 년이 더 됐다. 사실 패러다임은 이미 국어사전에 등재되며 외국어 딱지를 떼고 외래어가 됐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오는 패러다임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어떤 한 시대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근본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테두리로서의 인식의 체계. 또는 사물에 대한 이론적인 틀이나 체계.”

이렇게 그 뜻을 이해하기 힘든 말이 애용되는 이유는 뭘까.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이 있다. 패러다임이 ‘전환’과 짝을 이뤄 ‘패러다임의 전환(paradigm shift)’의 형태로 자주 쓰인다는 것이다.

혁명, 개혁, 발전…. 모두 좋은 말이며 우리 사회에 필요한 말이다. 그러나 혁명, 개혁, 발전은 모두 식상할 뿐만 아니라 ‘역사의 때’가 묻어 있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 말들의 동의어로 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해방 직후의 혼란 속에서 사람들은 도덕이 땅에 떨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도덕이라는 말 대신에 모럴(moral)이라는 말을 빌려 썼다. 이처럼 어떤 단어가 담고 있는 내용이 사회적으로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 단어를 둘러싼 환경이 단어를 오염시켰을 때 대안적인 단어가 부상한다.

패러다임의 인기는 이 말이 처음 사회적으로 애용되기 시작한 미국에서도 여전하다. 2008년 1월 테리 머다나 프랭클린앤드마셜대 교수와 마이클 영 마이클영전략연구소 경영파트너는 ‘오바마 패러다임’이라는 표현으로 버락 오바마 민주당 후보의 급부상을 설명했다. 그들은 ‘오바마 패러다임’의 특징으로 미국 정치의 대선 후보 선정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던 인종, 경험ㆍ경륜의 중요성이 사라졌다는 점과 ‘수사(rhetoric)가 중요할 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하게 됐다는 점을 들었다.

패러다임이라는 말은 얄궂게도 혁명과 밀접하다. 비록 ‘과학’혁명이기는 하지만 패러다임은 혁명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됐다. 원래는 언어학에서 사용하던 이 말을 일반인들까지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962년 토머스 쿤이 지은 『과학 혁명의 구조(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가 출간된 이후다. 20세기에 인문ㆍ사회과학 분야에서 가장 널리 읽힌 책이다.

토머스 쿤에 따르면 ‘정상과학(normal science)’라고 불리는 기성 과학 체제가 설명할 수 없는 예외가 나타나면 세 가지 방향으로 대응이 진행된다. 정상과학은 새로운 예외적 현상을 억지로 설명하려고 들거나 무시한다. 두 시도 모두 실패하면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해 예외적 현상을 ‘깔끔하게’ 설명한다.

영원한 패러다임은 없다. 모든 패러다임은 생성ㆍ발전ㆍ쇠퇴의 과정을 겪은 다음 대체될 운명이다. 그러나 살아 있는 패러다임은 수명이 다하기까지 활발하게 새로운 이론을 내놓는다.

대내외적으로 우리는 ‘정치적 급변의 구조’ 속에 있는지 모른다. 월스트리트에서 시작된 금융위기로 경제학 교과서를 다시 써야 한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국내적으로는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북쪽에서는 왕정이 아닌 나라에서 ‘왕정형 권력승계’가 진행되고 있다.

그야말로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정상과학적인 눈’으로는 이러한 ‘이상(異常ㆍanomaly)’ 현상들을 애써 외면하거나 기존의 틀에서 해석하려 할 것이다.

위에 인용한 국어사전에 나오는 패러다임의 정의를 다시 한번 들여다보자. “어떤 한 시대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근본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테두리로서의 인식의 체계. 또는 사물에 대한 이론적인 틀이나 체계.”

두 가지 생각이 든다. 패러다임이 바뀐다는 것은 결국 혁명이다. 그런데 우리에겐 과연 그런 패러다임이 애초에 있었을까.

그래서 다시 패러다임이라는 말이 지금의 의미로 사용된 책 제목을 보게 된다.

『과학 혁명의 구조』

우리에겐 ‘과학’과 ‘혁명’과 ‘구조’를 보는 눈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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