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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김정운 통 크게 키워 … 7세부터 벤츠 운전시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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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초밥 요리사로 북한에 들어가 7세부터 18세까지 정운을 옆에서 지켜본 '김정일의 요리사' 후지모토 겐지(藤本健二·62)는 4일 일본 도쿄 시내 그의 숙소에서 가진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에 따르면 정운은 어렸을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면서 김 위원장의 신임을 받았다. 그래서 후지모토는 "북한의 후계자감 인물은 정운 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정철은 성격이 부드러워서 정운이 후계자가 되더라도 정철이 해외로 쫓겨나는 등 형제 간 권력 투쟁 문제는 없을 것으로 본다"고 예상했다.

최근 일본 언론에서 해외 망명설을 거론한 장남 정남(38)은 처음부터 후계자 후보가 아니라고 했다. 후지모토는 "13년 간의 북한 체류 중 한 번도 정남을 보지 못했다. 가족이 있던 성혜림과의 사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내세울 수 없었다. 정남은 '로열 패밀리'와는 완전히 차단된 인물"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왜 후계자가 정운이라고 생각하는가.

"김정일은 고영희(2004년 사망)와의 사이에 태어난 왕자들(정철·정운 형제)만 아들로 생각했다. 둘을 드러내놓고 차별한 적은 없다. 정철은 낙천적이고 정운은 적극적이었다. 그래서 정철보다는 정운을 더 이뻐했다. 정운은 보면 볼수록 완벽하게 갖춰진 인물이 되고 있었다. 그래서 정운이 후계자가 되리라고 예상했다. 김정일이 두 아들 앞에서 직접 칭찬하거나 꾸짖은 적은 없다. 그냥 부모로서 말한 적은 한번 있었다. 식사 후 두 아들이 농구장으로 나가자 김정일이 '정철은 마음이 여려서 안 된다. 정운은 나하고 닮았다'고 간부들에게 자식들을 평가했다. "

-후계 구도를 공표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나.

"북한의 일반 국민에게 26세의 정운을 후계자로 인정받기는 어렵다. 그러나 간부들은 기득권을 지키려면 세습밖에 없다고 보고 있다. 간부들은 모두 정운을 지켜봐 왔고 후계 구도를 받아들이고 있을 것이다. 북한의 실질적인 2인자인 장성택 노동당 행정부장이 4~5년 (건강 문제가 있는 김정일을) 대행하면 정운이 30세가 된다. 2012년은 김일성 탄생 100년이 된다. 이때 후계자를 공식화하면 일반 국민의 저항도 수그러질 것으로 본다."

-정운은 어떤 성격의 인물인가.

"12살 때 큰 소리로 화를 낸 적이 있다. 여동생이 '작은 오빠'라고 하자 화를 낸 것이다. 나는 그 후로 정철은 큰 대장동지라고 부르고 정운은 ('작은'을 빼고) 그냥 대장동지라고 불렀다. 형을 무시하지는 않았지만 정운은 상당히 기가 셌다. 그래서 스포츠에도 만능이고 할리우드 등 온갖 종류의 영화도 좋아하고 취미도 많다. 김정일은 정운이 어렸을 때부터 통 크게 키웠다. 음식이라면서 술도 마시게 했고, 7세부터 초대소 안에서 자동차 운전도 시켰다. 벤츠 600을 몰았는데 의자를 바꿔서 엑설레이터 등을 밟을 수 있도록 했다. 술은 종류를 가리지 않고 잘 마셨고 취하면 그저 기분 좋게 이야기하고 놀았다."

-정운이 국제 정세에 대해 말한 적이 있나.

"마지막으로 봤던 18세 때만 해도 어려서인지 그런 것을 말한 적은 없다. 그러나 정운이 스위스 학교를 다녔고 유럽 여행을 자주 해봐서 세계에 대한 지식은 있을 거라 생각한다. 김 위원장이 금연하는 바람에 담배를 몰래 피웠는데 2001년 초 이런 말을 한 적은 있다. '나는 맨날 제트스키 타고 해양스포츠하고 롤러블레이드·승마를 하고 있는데 일반 국민은 어떻게 하고 있나'라고 물었다. 18세에 벌써 일반 사람들을 궁금해 하고 있어서 놀랐다."

-후계자 수업은 어떻게 받았나.

"원산·신천·평양 등 전국에 있는 초대소를 돌면서 자연스럽게 노동당·군 간부들을 만나 이들과 어울리는 방법을 배웠다. 아마 성인이 된 후로는 직접 리더십을 발휘했을 거이다. 이들 간부들도 자연스럽게 3세 세습의 구도를 통한 후계 계승을 생각하게 됐을 것이다. 스위스 국제학교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왔기 때문에 영어를 자주 사용했다. 초대소에서도 영어로 대화하면서 레슨을 받기도 했다. 일본어는 잘 못했다. 오전 중에는 집에서 공부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나와 만나는 장소는 식당이나 초대소여서 언제나 놀기만 했다. 7세 때 신천초대소에서는 파도(波)를 한자로 어떻게 쓰는지 물어보길래 '아 한자도 공부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정운을 마지막을 본 것은 언제인가.

"2001년 4월 22일 원산 초대소였다. 언제나처럼 경비 1만5000달러(약 1800만원)를 주면서 '잘 다녀오라'고 했는데 이미 탈북을 결심했기 때문에 마음이 괴로웠다. 지금도 권총이나 스노클링용 도구와 선글래스, 야구용품을 일본에서 사다주었을 때 기뻐했던 모습이 생생하다. 버락 오마바 미국 대통령이 국제사회가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는데 전쟁을 한다면 북한은 열흘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

-정운의 사진은 어떻게 구했나.

“2001년 3월 원산초대소에서 정운과 함께 롤러스케이트를 타다가 미끄러져서 다쳤다. 치료를 받고 누워있는데 밤 12시 반에 전화가 왔다. 초대소의 메인 식당 역할을 하는 센터에 오라고 해서 가보니 농구 선수 4명과 함께 러시아 보드카를 마시고 있었다. 정운은 ‘후지모토 살아있어’라며 정겹게 말을 걸어왔다. 옆에 앨범이 있었다. 펼쳐보니 얼마 전 파티 때 어깨동무한 사진이 있었다. 그 사진은 무대에서 내가 섹서폰을 불고 노래를 하고 있었을 때였다. 한국의 ‘사랑해’ 가요를 부르면서 가사를 개사해 ‘사랑해 대장님 정말로 사랑해’라고하자 정운이 아주 기뻐했다. 그 때 대장님이 어깨동무를 했고 사진을 찍었다. 이 사진 가지고 싶다고 했더니 안 된다고 해서 그럼 앨범에서 어릴 때 사진을 부탁했더니 하나 뽑아서 주면서 절대로 공개하지 말라고 했는데 공표해 버렸다.”

‘김정일의 일본인 요리사’ 후지모토 겐지가 4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김정운의 사진을 보여 주고 있다. 도쿄=김동호 특파원

-김정일은 언제 처음 만났나.

“1982년 평양에 처음 개설한 안산관에서 일할 때였다. 식당 책임자가 갑자기 20~30인분의 초밥을 준비하라고 해서 준비해놓고 새벽 2시에 불려나갔다. 바다가 보이는 곳을 갔는데 그곳이 원산 초대소였다. 군복 차림의 군인들이 30명 있었고, 중간에 일반복을 입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 안에서 얼굴을 볼 여유도 없었다. 긴장해서 초밥을 만들었는데, 일반 복장을 한 사람이 물었다.‘이게 무슨 생선인가’. 그래서 통역이 다랑어(참치)라고 답했다. 당시만 해도 다랑어는 북한에 처음 소개됐다. 다음날 평양 보통강 호텔에 돌아왔다. 거기서 신문을 보고 김정일이 있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주말에는 간부들을 늘 초대소로 부른다. 직접 생생한 목소리로 지금의 업무 상태를 점검한다.”

-고위계층은 어떤 곳에 살고 있나.

“간부들은 굉장한 아파트를 받는다. 한층 전체를 받는다. 집의 양쪽에 화장실이 있다. 김정일의 저택은 여러 곳에 있는데, 대동강 초대소의 경우는 집 구조가 벤츠가 도착하면 바로 현관 1층으로 통하게 돼 있다. 현관이 상당히 넓다. 평양에 있는 그의 저택에 간 적도 여러 번 있다. 그곳에서 물론 정운을 자주 봤다. 정운은 13년 간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봤다. 영국 옷감을 들여와 체구에 맞게 전속 재단사가 옷을 만들었고, 나도 그곳에서 옷을 맞추어 입었다.”

-장성택 당 행정부장이 정운을 밀고 있다는데.

“장성택은 북한의 2인자다. 아무리 높은 직책을 가진 사람도 그를 참모장 동지라고 불렀다. 누구든 대들지 못했다. 나는 장성택에게 상당히 신세를 많이 졌다. 가족끼리 카지노(바카라)게임을 해도 늘 장성택이 참가했다. 김정일은 청군, 부인 고영희는 홍군이었고 장성택은 홍군에서 게임을 했는데 언제나 따는 편이었다. 10만엔을 칩으로 바꿔서 점수를 많이 쌓는 사람이 먼저 현금으로 바꿔가는 게임을 즐기곤 했다. 그런데 언제나 장성택이 1, 2등을 하면서 많은 돈을 따갔다. 아침 5시까지 김정일과 둘이서 게임을 하기도 했다. 돈이 많은 김정일을 이길 수 없었다. 지난해 10월 김정일이 쓰러진뒤 장성택이 장군 대행에 나섰다는 보도를 듣고 가장 타당한 대응이라고 생각했다. 왕자들이 아직 어려서 정권을 맡길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일설에는 김일성이 간호사와의 사이에 낳은 김현(38)도 후계자로 거론하고 있으나 그를 본 적도 한번도 없다. 전혀 관련이 없다는 얘기다.”

-김정일과 고영희의 관계는 어땠나.

“고영희는 아주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둘 사이의 관계도 아주 좋았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과의 관계도 좋았다. 유방암에 걸렸는데, 프랑스 병원에서 완치됐으나 나중에 뇌경색으로 사망했다. 둘에게 정말 큰 신세를 졌다. 요리가 끝나면 어서 자리에 앉아 함께 밥을 먹으라고 했다. 김정일은 고영희가 곁에 있을 때만해도 확실히 권력을 갖고 있었다. 지금 흔들리고 있지만 김정일 사후에는 큰 혼란이 예상된다. 전쟁을 하면 북한 체제로는 열흘도 못갈 것이다.”

-왜 탈북을 결심했나.

“1999년 중국 베이징의 호텔에서 일본 경시청의 부장에게 전화를 한 것이 문제가 됐다. 사실상 경시청은 나를 지켜보면서 신변을 주시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보호 하에 있었던 것이다. 경시청은 1998년 나를 북한에 보내주지 않으려고 했지만 뿌리치고 북한에 돌아왔다. 경시청 부장은 내가 외국에 나오면 잘 있는지 안부만 전해달라고 당부했었다. 그저 잘 지내고 있다고 안부만 경시청에 전했을 뿐이다. 그래서 내가 잘못한 건 없다고 확신하고 북한에 간 것이다. 그런데 도청을 당했기 때문에 나는 가족과 함께 가택 연금을 당했다.”

-당신의 가족은 어떻게 지내나.

“아들은 19세. 딸은 17세다. 내가 (가족들을 두고와서) 나쁜짓을 했다. 탈북 이후 가족들은 2년 정도 순천시의 탄광에 보내져 일을 시켰다는 얘기를 들었다. 마음으로 반성했다. 나는 어차피 외국인이니까 가족들은 벌을 안 받을 줄 알았다. 가족은 지금은 평양에 돌아와 있다. 평양에서 가족들은 나에게 수신자부담전화로 가끔 전화를 한다. 올 1월에도 통화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전화가 안 된다. 나는 평양에 있는 가족에게 편지는 보내고 있다. 그 때 1999년부터 2000년 4월까지 1년 6개월간 자택 연금만 안당했어도 지금도 북한에 있었을 것이다. 연금은 김일성 생일 끝나고 풀어졌는데 탈북을 결심했다. 나는 김정일이나 정운을 원망하지 않는다. 자유가 구속당하는 경험을 하자 그렇게 살 수는 없었다. 매주 세 번 배급은 나왔기 때문에 먹고 사는 것은 문제 없었다.”

-어떻게 탈출했나.

“해외 식자재 조달을 구실로 삼았다. 평소 식자재는 해외에서 조달했다. 도쿄의 쓰키지 시장에서 구입해 비행기로 나리타에서 베이징을 경유했다. 나무 상자에 얼음을 가득 채워 1200kg 짜리 참치 한 마리를 넣었다.베이징에는 수시로 출입했고, 일본에도 자주 왔다. 그래서 일본에서 가져온 음식 프로그램을 보여주면서 탈출을 시도했다. 예상대로 홋카이도의 성게(우니) 덮밥을 보여주자 역시 김정일이 얼른 다녀오라고 했다. 필요한 경비를 말하자 김정일은 즉시 ‘오케이’ 사인을 해주었다.”

도쿄=김동호 특파원

◇후지모토 겐지=도쿄 긴자(銀座)의 초밥집 요리사였다. 1982년 8월 평양 시내 음식점 안산관에서 일본 요리사를 구하자 매달 50만엔의 봉급을 받고 입북했다. 1988년부터 김정일 위원장의 최측근 요리사가 됐다. 김 위원장이 직접 성대한 결혼식과 피로연을 베풀어주고 결혼한 북한 여성 사이에 1남(19)·1녀(17)를 낳았다. 식재료 구입을 위해 일본·싱가포르·마카오·베이징 등을 드나들다 2001년 4월 식재료를 구한다고 속여 김정일 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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