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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일제 유산’ 인감제도 바꾸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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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인감 때문에 빚어지는 불행한 사례는 많다. 남편이 해외출장 간 사이 남편 몰래 인감도장을 사용해 거액의 위자료를 받는 조건으로 이혼 처리한 사례, 신차를 구입하려고 고객이 맡긴 인감증명서로 제3자에게 차를 팔아넘기고 잠적한 사례, 당좌어음 사기 등 인감으로 인한 사회적 불신과 혼란은 예상을 뛰어넘는다. 이는 모두 인감에 대한 지나친 신뢰와 인감만 있으면 된다는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인감이 우리의 소중한 재산을 지켜주고 본인 의사의 진정성을 담보할 수 있다는 기대는 이제 접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인감증명은 일제의 유산이다. 1914년 조선총독부는 경제활동에서 일본인을 보호하고 조선인들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감증명규칙’을 제정하여 시행했고, 광복 후 한국 정부가 이를 답습한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 현행 인감증명 제도가 갖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인감에 대한 과도한 신뢰다. 사적 거래 입증에 국가가 언제까지 관여할 것인가를 재고해야 한다. 부동산 계약 등 사적 거래 시에 행정기관에서 발급한 인감증명서를 활용하기 때문에 국민은 이를 너무 신뢰한 나머지 당사자 확인 등 거래의 진정성 확인을 소홀히 하고 있다. 인감 위·변조 등의 인감사기 행각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둘째, 국민의 불편함이다. 공적 영역은 물론 사적 부문 까지 본인확인 수단으로 인감이 너무 많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부동산 등기 등 공적 영역에서만 240종이 넘고 연간 인감발급 통수도 5000만 통에 이른다고 한다.

셋째, 과도한 사회적 비용 지불 문제다. 제도운영과 민원인들의 행정기관 방문과 같은 직접 비용에다 인감 사고로 인한 소송 등에 들어가는 법적 분쟁 비용까지 계산한다면 인감제도 유지에 천문학적 비용이 지불되고 있다.

인감은 세계 200여 개 국가 중에 유독 한국·일본·대만 등 3개국만 채택하는 제도다. 행정안전부와 한국갤럽의 최근 공동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 65% 이상이 인감제도 개편을 희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민의 재산권 보호와 사회적 편익이 담보되는 방향으로 제도개편의 대안을 생각해 보았다.

첫째, 법원과 행정기관 등에 거래당사자 본인을 대신해 대리 신청하는 경우에는 변호사·법무사·행정사 등 자격사가 법률에 규정된 소관 사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당사자 본인 의사를 책임져서 확보하도록 법제화하고, 인감증명 첨부 대신 주민등록증·운전면허증 등 국가 발행 신분증 사본을 첨부토록 해 국민 편의를 도모하는 것이다. 이 경우 손해보험 가입과 감독강화 등의 제도보완이 전제돼야 할 것이다.

둘째, 거래금액이 크거나 법률관계가 복잡한 경우에는 인감보다 더 확실하고 집행력이 부여되는 공증제를 이용하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국민이 큰 부담 없이 이용할 수 있도록 공증제의 대중화가 전제돼야 한다.

셋째, 선진국에서 일반화돼 있는 개인 서명을 보조적으로 사용하자는 것이다. 주민등록증이나 운전면허증에 자기 고유의 서명을 사전 등록하여 거래 시에 도장 대신 활용한다면 신뢰와 함께 편리함이 확보될 것이다.

강병규 행정안전부 제2차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