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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은 후계 자리 ‘쟁취’ 했고 김정운은 ‘상속’ 받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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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서 3남 김정운(25)으로 권력이 세습된다면 북한은 3대에 걸친 세습 정권이 세워진다.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일이다. 후계 작업이 성사될 경우 두 사람은 세습 결정 과정에서 아버지의 든든한 배경을 바탕으로 후계자가 되는 공통점을 갖게 된다. 그러나 내막을 들여다보면 다른 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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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김 위원장은 후계자를 ‘쟁취’한 측면이 강한 반면 정운은 ‘상속’에 가깝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김 위원장은 후계자로 낙점되기 전 이복형제인 평일, 삼촌인 김영주를 비롯해 빨치산 후예들과 후계 레이스를 벌였다. 김일성 주석 빨치산 동료들의 세력을 등에 업고 반대 세력을 잠재웠다.

노동당 과장과 부장, 비서, 정치국 위원 등을 거치며 나름대로 경험을 쌓고 검증도 마쳤다. 고위 탈북자인 현성일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책임연구위원은 “김 위원장이 후계자로 결정된 것은 김일성의 아들이란 점보다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은 측면이 강하다”고 말했다.

반면 정운은 이렇다 할 경쟁자가 없었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정남과 정철 등 두 형이 있지만 북한 내부의 부정적 평가와 건강상의 이유로 전면에 나서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김 위원장이 정운을 후계자로 결심한 데는 정운밖에 다른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란 분석이 그래서 나온다.

김 주석은 주변에서 후계 논의를 제기할 당시 “10년은 더 할 수 있다”며 후계자 낙점에 소극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김 주석의 부인 김성애가 치맛바람을 일으키자 오진우 등 빨치산 파들이 반발해 김 위원장이 후계자로 일찍 결정됐다. 1970년대 초 여맹 위원장이던 김성애가 권력의 전면에 나서고 아들 평일을 후계자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자 빨치산 세력들이 위기의식을 느낀 것이다. 김 위원장도 2000년대 중반 후계 논의를 중단시킨 적이 있다. 하지만 지난해 뇌졸중 이후 10월께 정운이 긴급 결정된 것이다.

이 때문에 김정일과 김정운은 후계 수업 과정에서도 큰 차이가 있다. 김 위원장은 이미 대학 시절 김 주석의 현지지도를 쫓아다니며 실무를 익혔고, 64년 김일성종합대학 졸업 이후 당·정·군의 밑바닥부터 훑으면서 실력을 다졌다. 이를 바탕으로 김 위원장은 후계자가 되면서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다. 다양한 경험을 했던 아버지와 달리 정운은 이제부터 길을 닦아야 하는 상황이다. 정운은 지난해 12월 대외 석상에 처음 얼굴을 보였다. 현재는 당과 국방위원회의 중견 간부를 맡고 있다는 관측만 있을 뿐이다.

무엇보다 달라진 대외 환경은 김 위원장이 후계자를 정하고도 고심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70년대 북한의 경제 상황은 호황기였다. 중국과 소련이라는 든든한 후견 세력도 있었다.

그러나 현재 상황은 녹록지 않다. 당장 경제난이 발목을 잡고 있다. 또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붕괴로 정치·경제적으로 고립돼 있다. 미사일과 핵 등 대량살상무기로 인해 국제사회에서 제재 조치가 논의되는 등 내우외환을 겪고 있다.

이 때문에 국가정보원의 확인에도 불구하고 김정운 후계에 대해 의구심을 드러내는 시각도 나온다. 동국대 김용현(북한학) 교수는 “김 위원장은 후계자를 지명하는 순간 자신의 권력이 내리막길이란 점을 본인의 경험으로 체득한 인물”이라며 “지금은 후계자를 내정한 단계지 후계 구도를 완성한 단계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이 지금부터 정운을 후계자로 만드는 작업에 들어간 것이란 의미다.

정용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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