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다윈의 편지 ⑭ 2등 될뻔 하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4면

친애하는 월러스씨,

(…) 저는 라이엘 선생님과 후커가 공정한 처리 방식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과정에 전혀 관여를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일처리에 어떤 인상을 받았는지 신경이 많이 쓰이는군요. 저는 간접적으로 당신과 그들 모두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 라이엘 선생님의 말대로 대작을 끝내보려고 안간힘을 쓰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제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축약본 정도가 적당한 분량이었습니다. (…) 이 축약본은 400~500페이지 정도 되는 작은 책이 될 것 같네요. (…)   1859년 1월 25일, 찰스 다윈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창의적 사고의 결과물이라 할 과학적인 발견이 같은 시기에 등장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뉴튼과 라이프니츠는 미적분 체계를 동시에 발견했고 마이어·헬름홀츠·줄 등의 학자들이 1840년대에 독자적인 방법으로 에너지 보존법칙을 만들었다.

‘자연선택’이라는 자신의 독창적인 생각을 다른 사람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던 다윈은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자연선택에 의한 종의 변화에 대한 생각을 하고도 20여 년 동안 공식적으로 발표를 하지 않았다. 통념을 뒤집는 생각이라 완벽한 대작을 써서 모든 사람들을 단숨에 제압하겠다는 욕심 때문이었다.

1858년 6월 18일, 알프레드 월러스(1823~1913)가 보낸 두툼한 편지를 받고 다윈은 깜짝 놀랐다. 자신의 생각이 그대로 월러스가 쓴 논문에 들어있었다. 과학 연구에서 먼저 발견한 사람의 이름만 남는다는 것을 알고 있던 다윈은 20년 공든탑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자신의 생각을 알고 있던 친구들과 이야기를 했고, 라이엘과 후커의 주선으로 린네학회에서 다윈과 월러스의 논문이 함께 발표됐다. ‘자연선택’에 대한 생각이 공식적으로 세상에 나온 것이다. 다행히 월러스는 자신의 우선권을 주장하지 않았고 둘 사이에는 분쟁이 없었다. 하지만 다윈은 월러스가 우선권을 주장해 싸움이라도 생기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종의 기원』 출간에 앞서 조심스레 월러스의 반응을 떠 보는 이 편지를 쓴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다윈처럼 너그러운 상대를 만나는 운을 기대할 수는 없는 일. 오늘날 과학자들은 남들에게 뒤질세라, 자신의 발견을 한시라도 빨리 발표하기 위해 필사적이다. 제출된 시간은 분·초 단위로 표시된다. 따져보면 주어진 자연에 합리적으로 접근하는 과학에서 동시발견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2등은 더 억울하다. 

주일우 ‘문지문화원 사이’ 기획실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