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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대학을 살려야 한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한국 경제를 총체적 위기상황으로 빠뜨린 외환위기가 대학가에도 영향을 미쳐 몇달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대학 부도 사태가 눈앞의 현실로 나타났다.

비효율적이고 낭비적인 대학구조를 시대변화에 맞추어 개혁하지는 않고 교세 확장에만 집착해 무분별하게 분교를 설립하고 학과를 증설하는가 하면 외채까지 빌려 무리하게 시설을 확장하는 등 방만한 경영행태를 타성적으로 답습해 온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준엄한 자기성찰과 개혁에 대한 과감한 결단 없이는 한국 대학은 새로운 세기의 전개에 즈음해 한국 사회가 요망하고 있는 시대적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됐음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 몸집도 유지하기가 어렵게 됐다.

한국 대학은 외형상 양적 규모에서는 선진국 수준에 이르지만 세계 1백대 대학에 들어가는 대학은 단 하나도 없을 정도로 질적 수준이 크게 낙후돼 있다.

뒤늦게나마 많은 대학들이 구조개혁을 추진하고 봉급을 동결하는 등 자구노력을 서두르고 있긴 하지만 임기응변적인 처방에 불과하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대학의 위상과 기능을 오히려 위축시킬 우려가 있어 자못 걱정스럽다.

우리나라 대학은 교수 1인당 학생수가 무려 50.6명으로 선진국의 5배나 되고 학생 1인당 교육투자비는 5분의1에 지나지 않는 등 교육여건이 극도로 열악하므로 지나친 긴축은 오히려 대학교육을 퇴보시킨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아무리 재정형편이 어려워도 교육 및 연구 인프라에 대한 투자만큼은 대학의 질을 떨어뜨리지 않을 정도의 수준을 유지해야지 그것마저 IMF위기를 명분으로 동결한다면 한국 대학은 국제경쟁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정보화시대를 맞아 한국 대학이 세계수준으로 발돋움하려면 초고속 네트워크와 데이터베이스를 확충하는 등 최첨단 정보인프라를 갖추고 전세계의 연구성과를 교육 및 연구활동에 즉각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위성통신 교육을 실시할 수 있도록 사이버시스템도 구축해야 하고 대학 연구실이 명실상부하게 연구개발 (R&D) 의 산실이 될 수 있도록 연구여건을 개선해야 한다.

그러나 거의 전적으로 학생들의 등록금에만 의존하고 있는 한국 대학의 열악한 재정구조로는 이러한 일들이 너무나 힘겨울 뿐이다.대학은 국가와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키우고 산업발전에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는 국가 공공재의 생산처다.그러므로 정부는 대학에 대한 재정지원을 선진국 수준으로 확대해야 하고 기업 또한 산학협동연구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한다.

대학도 상아탑의 권위에 안주하면서 현상유지에만 치중할 것이 아니라 급작스런 환경변화의 위기를 오히려 발전의 기회로 활용하는 능동성과 진취성을 발휘해야 한다.

경제환경이 악화돼 재정위기가 가중되고 변화와 개혁이 강조되는 오늘의 시점에서는 총장이 경영마인드와 세일즈맨십을 발휘할 필요가 있으며 기금확보를 위해 국내시장은 물론 국제무대까지 누비면서 마이크로 소프트 연구기금과 같은 대형 외국펀드를 얻어와야 한다.

독일 자유베를린대의 게를라흐 (J.W.Gerlach) 총장은 대학발전 기금을 확보하기 위해 전세계를 돌아다니고 있으며 한국에도 수차례 다녀갔다. 대학은 교육의 장을 학내로 한정시키는 상아탑 중심 사고를 지양하고 적극적으로 교육시장을 개척해 일반 시민에게 교육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사회에 대한 봉사기회도 넓히고 수익도 늘려나가는 기업정신을 어느 정도 발휘해야 한다.

생리적으로 변화를 싫어하는 대학사회를 발전시키려면 경영책임을 맡고 있는 총장부터 명망가나 선비형의 소극적인 자세를 떨쳐버리고 시장 (市場) 지향적인 변신을 대담하게 시도해야 한다.

대학이 살아나야 경제도 살아나고 나라도 살아난다는 점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되며 대학경영의 책임을 맡은 총장뿐만 아니라 정부와 기업도 이 점을 유념하고 대학 살리기에 적극성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김호진〈고려대 노동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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