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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창·죽봉 용어 다툼보다 평화 시위가 더 중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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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0면

[일러스트=박용석 기자 parkys@joongang.co.kr]

어떤 사건의 성격이나 진실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부닥치게 되는 고민거리가 있다. 용어 선택의 문제다. 용어를 선택한다는 것은 그 사건의 성격에 대한 ‘관점의 틀’을 제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용어 선택에는 항상 신중한 결정이 필요하다. 그런데 현실에선 용어의 뜻과 풀이에 부합하지 않는, 의도적 상황규정용으로 이용되는 일이 왕왕 있다.

요즘 벌어지는 ‘죽창 논쟁’이 바로 그 예다. 지난달 16일 민주노총 화물연대가 대전 폭력시위에서 사용한 4~5m 길이의 대나무 용품에 대해 당사자들이 서로 다른 용어를 사용해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 경찰은 계획적으로 ‘죽창’이 사용된 시위라고 규정했지만, 민주노총은 ‘만장용 대나무 깃대’일 뿐이라고 반박한다. 검찰과 일부 언론은 ‘죽봉’이란 표현을 쓴다. 이렇다 보니 정작 헷갈리는 건 독자들이다.

경남 김해의 정홍준씨는 “만장 깃대가 어째서 죽창인가. 죽창이란 표현은 폭력성을 부각시켜 경찰의 과잉진압을 합리화하려는 것에 불과하다”는 의견을 전해왔다. 충남 태안의 이지영씨도 “죽창 비슷한 게 사용된 것인지 모르겠으나 섬뜩한 느낌을 주는 이런 말을 꼭 써야 하느냐”라고 물어왔다. 반면 익명을 요구한 한 주부 독자는 “신문에 실린 사진을 보니 대나무 막대기가 인명살상용으로 쓰인 게 분명하다. 죽봉이니 대나무 깃대니 하는 것은 말장난에 불과하다. 언론에서 명확한 정의를 내려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사전을 찾아보면 죽창은 대나무 끝을 사선으로 잘라낸 인마살상용 무기라고 정의돼 있다. 하지만 죽봉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나와 있지 않다. 굳이 해석하자면 봉이 둘레가 둥근 가늘고 긴 막대기를 뜻하므로 대나무 막대기 정도가 될 듯하다. 이들 용어는 민감한 사정을 내포하고 있다. 만장용 깃대나 죽봉은 그 자체로 공격성을 담지 않은 중립적 도구다. 반면 죽창은 사람을 해치기 위한 무기다. 만약 죽창을 들었다면 상대방을 해칠 의도를 가진 폭도가 된다. 어떤 용어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지난달 16일 민주노총의 대전 시위의 성격이 달라진다. 순수한 집회냐 아니면 폭력시위냐다.

사실 그날 시위에서 사용된 것은 끝이 우산살처럼 여러 갈래로 갈라진 대나무였다. 깃발을 달았던 대나무 막대기를 시위대가 땅바닥에 내리쳐 뾰족한 무기로 만들었다. 시위대가 갈라진 대나무 끝을 진압경찰의 안면보호 격자망 사이로 찔러 넣으며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많은 전·의경이 눈과 얼굴에 상처를 입었다. 각막을 다쳐 자칫 실명할 뻔했던 의경도 있었다. 날카로운 대나무 끝으로 눈을 공격했다면 범죄행위다.

과도로 사람을 찌르면 그때부터는 과도가 과일 깎는 칼이 아닌 흉기로 변하는 것처럼 일단 싸움도구로 이용된 이후부터는 깃대나 죽봉도 단순한 봉이 아닐 수 있다. 죽봉이라고 한다 해도 휘두르다 끝이 깨지면 날카로워진다. 그러면 사실상 무서운 죽창이나 다름없는 흉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용어 규정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모든 시위는 평화적으로, 합법적으로 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야 시위를 하는 측의 주장이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서명수 고충처리인, 일러스트=박용석 기자 parky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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