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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방 양념 대중가요 '내레이션'의 미학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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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술이 거나하게 올라 2차로 찾은 노래방. 굉음과 고성이 작렬하는 광란의 와중, 갑자기 쥐 한마리 죽은 듯 조용 - 해지면서 흘러나오는 대사 : "내가 그녀를 처음 본 순간에도 이미 그녀는 다른 남자의 아내였었지/하지만 그건 내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어/왜냐하면 진정한 사랑은 언제나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법이니까/ (보통 이 시점에선 울부짖게 마련이다) 난 멈출 수가 없었어/이미 내 영혼은 그녀 곁을 맴돌고 있었기 때문에…" (조관우 '늪' ) 노래 앞머리 또는 간주 부분에 끼어드는 내레이션. 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을 시발로 랩이 전면부상하기 전까지만 해도 전형적인 가요형식에 변화를 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대중음악평론가들에 따르면 내레이션은 "추상적으로 표현된 노랫말을 서사화 (敍事化) 하는 기능을 한다" 고 한다.

노래라는 운문 (韻文) 형식에 '+α' 를 해 미처 멜로디에 싣지 못한 여분의 욕구를 소화한다는 얘기. 형식상으로는 발라드와 연관이 깊다.

열창 끝에 "내가 만약 외로울 때면 누가 나를 위로해주지" 라고 속삭이는 '여러분' (윤복희) 이나 "처음엔 마음을 스치며 지나는 타인처럼 흩어지는 바람인 줄 알았는데" 로 시작하는 '열애' (윤시내) , "내가 지금 이 세상을 살고 있는 건 21세기가 간절히 나를 원했기 때문이야" 라는 명구 (名句) 를 남긴 '킬리만자로의 표범' (조용필) 등은 이 분야의 고전에 속한다.

부르는 가수의 고뇌 어린 표정이 말해주듯 내용은 심각하고 엄숙하다.

고백하듯 때론 절규하듯 - . '아버지' '날아라 병아리' 'The Ocean' 등 N.E.X.T의 앨범마다 두세곡 정도 반드시 들어가는 내레이션이 대표적인 경우다.

반면 최근 가요 속에 삽입되는 내레이션은 대부분 간결하고 감각적이다.

'부연설명' 이라는 독립적인 구실을 한다기보단 시선을 잡아채는 인트로 (도입) 나 이기찬의 '유리' 처럼 노래 끝부분에 살짝 걸치는 등 양념에 가깝다.

얼마 전 나온 박진영 4집을 보자. 머릿곡 'Honey' 는 "오~허어니이" 하는 개그우먼 정선희의 간드러진 콧소리로, '그녀를 잡아요' 는 "뭐라구요/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구요/난 그런 거 믿지 않아요" 라는 박진영의 씁쓸한 멘트로, '십년이 지나도' 는 "미안해…/너도 금방 좋은 사람 만날거야/괜찮지?" 라는 탤런트 최진실의 미안한 말투로 시작한다.

"주제를 몇 마디로 압축해 노래가 본격적으로 나오기 전에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이라는 설명이다.

베이시스의 '잔인한 날' 에서 개그우먼 홍진경의 내레이션은 본인의 코믹한 이미지와 배치돼 오히려 안 하느니만 못한 격. 연예인의 잠깐출연은 '누구누구가 내레이션 했다더라' 는 식으로 화제를 선점하려는 의도가 엿보이기도 한다.

탤런트가 가수를 겸하는 경우 드라마 속 이미지를 그대로 이용하기 위해 대사를 넣기도 한다.

"사랑…상쾌한 숨결로 날 잠들게 하던 사랑" 으로 말문을 여는 탤런트 구본승 - 장동건의 '풍경' 이 그 예. "대사를 넣음으로써 함께 출연했던 '사랑' (MBC 월화드라마) 의 낭만적이고 애틋한 분위기를 연상시키려 했다" 는게 공동앨범의 프로듀서를 맡았던 윤현식씨의 얘기다.

이 앨범에는 바흐의 음악을 배경으로 해 두 스타들의 내레이션만으로 이뤄진 곡이 두 곡이나 포함돼 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그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라고 누군가 읊조렸듯 훗날 제목은 잊어도 보석같은 내레이션은 가슴 속에 남는 것, 그것이 내레이션이 노릴 수 있는 최대의 효과 아닐까.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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