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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삼 칼럼]영화와 책과 삼겹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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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불황이 빚어내는 풍속도는 나라마다 천차만별이다.

지난 1929년의 미국 대공황때 호황을 누린 곳은 영화관이었다.미국 국민들은 살림살이가 어려워져 다른 오락거리를 즐길 여유가 없어지자 상대적으로 값이 싼 영화관을 즐겨 찾았기 때문이다. 일본의 경우 지난 오일 쇼크때 재미를 본 곳은 서점이었다.

출판왕국의 국민답게 일본 국민들은 불황을 이겨내는 지혜를 책에서 얻고자 했기 때문이다.그러면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어느 곳이 호황일까. 우리도 영화관? 아니다.

요즘 영화관도 잘 안된다고 한다.문화민족이라고 자부하니까 그러면 서점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호황은커녕 찾는 발길이 뚝 끊겨 줄줄이 문을 닫고 있는 중이다.

그러면 과연 어디가 호황인가.답은 '삼겹살집' 이다.소주 한 잔은 해야겠고 쇠고기는 비용이 많이 드니까 너도나도 삼겹살집을 찾는 통에 쇠고기값은 내리고 삼겹살값은 수직상승해 한때는 삼겹살값이 쇠고기값을 웃돌기까지 했다.

이런 풍속도를 입증이라도 하듯 한 대기업의 임직원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를 보면 '요즘 회식장소로 인기 있는 곳' 1위가 '삼겹살집' (51%) , 다음이 '호프집' (26%) 이었다.

요즘같은 불황에 소주 한 잔 하는 걸 나무랄 수는 없다.소주 한 잔 걸치자면 자연 삼겹살이 생각날거다.

그러나 다른 나라 사람들이 불황을 영화나 책을 보며 견뎌낼 때 우리는 삼겹살로 버틴다? 아무래도 뒷맛이 개운찮고 허전한 느낌을 지우기가 어렵다.

라디오에서 DJ일 하는 방송인 최유라씨가 최근 한 신문에 이런 내용의 글을 쓴 적이 있다.

남편이나 자식들이 '솥뚜껑운전사' 니 '밥순이' 니 해서 속상하다고 하소연하는 주부들이 정작 가계지출을 줄일 때는 신문이나 잡지구독을 제일 먼저 끊는 게 안타깝다는 것이다.

영화든, 책이든, 신문.잡지든 그 무엇이든간에 문화적인 것은 여유있을 때나 접하는 것이란 사고방식은 누가 만들어준 것일까. 최근 한국출판연구소가 주관한 국민독서실태조사에서는 다음과 같은 서글픈 결과가 나왔다.

전국 20세 이상 성인남녀 1천2백명을 대상으로 한 이 조사에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도서' 를 물어본 결과 11위까지의 순위는 이랬다.

①삼국지②아버지③성경④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⑤태백산맥⑥테스⑦대지⑧잃어버린 너⑨남자의 향기.제인 에어.어린왕자. 이 가운데 ②④⑤⑧⑨의 5권이 우리 작가의 소설이고 '태백산맥' 을 제외하고는 근래에 나온 것들이다.

우리 작가들의 역량을 무조건 폄하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내용이 이렇다는 건 문제가 아니겠는가.

인류의 지적 자산인 그 수많은 명저 (名著).명작 (名作) 들은 다 어디로 갔나. 이 조사 결과는 우리 국민의 대다수는 '삼국지' 이외에는 별로 읽은 게 없으며 굳이 꼽는다면 최근의 대중적인 베스트셀러가 고작이란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이런 우리의 척박한 문화풍토와 정신적 궁핍은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 정부 예산서를 들춰보면 그 주범이 정부임을 단번에 알 수 있다.

21세기는 '문화의 세기' '지식정보의 시대' 라는 말은 정부측이 가장 자주 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 전체 예산 가운데 문화관광부의 예산은 단 1%를 넘지 못하고 있다.

두루 알다시피 그 1%도 안되는 예산에는 문화관계 예산뿐 아니라 관광과 체육예산까지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예산절감을 위해 추경예산을 편성하게 되자 재경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 정말로 쥐꼬리만한 예산에서 13.2%를 줄여 국회에 제출했다.

불황이 닥치자 제일 먼저 신문.잡지구독 끊고 문화생활 줄이는 일반 주부와 무엇이 다른가.

그 정부에 그 국민인 것이다.

정부나 국민이나 문화에 관한 인식이 이 정도여서는 현재 경제위기를 벗어난다한들 '문화의 세기' '지식정보의 세기' 라는 다가오는 시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지 않다.불황을 영화를 보며 견뎌낸 국민, 책을 읽으며 견딘 국민, 소주에 삼겹살로 버틴 국민이 문화의 세기에서 자유경쟁할 때 승리자는 누가 될 것이라고 보는가.

유승삼<중앙 m&b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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