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 길잡이]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선·악 넘는 휴머니즘 모색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최근 서울지역 주요대학 입시관련 처장들이 99학년도 대학입시에서 논술에 대해 공동보조를 취하기로 합의하고 시험도 지난해와 같이 고전을 바탕으로 출제키로 했다. 그러나 기대했던 동.서양의 고전 선정작업은 미뤄졌다.

고전을 몇권으로 한정하게 되면 또다시 암기위주 교육이 성행, 논술고사의 도입취지가 무색해진다는 이유에서다. 그렇다고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논제의 제시문으로 출제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지적 반성' 을 요구하는 책이어야 한다는 점에서다. 문학작품이든, 인문학적 저작이든, 자연과학적 저작이든 '지적 행위' 가 개입될 수 없는 것이어서는 논제로 출제될 수 없다.

이처럼 '지적 행위' 가 개입된 책이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고 따라서 논쟁적으로 읽힐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은 비록 문학작품임에도 논제로 출제될 수 있는 전형적인 저작이다.

실제로 지난번 시험에서 이 작품은 '신정론 (神正論)' 을 바탕으로 '선.악, 생.사에 대한 어떤 태도가 바람직한지 논술하라' 는 서강대 인문계 논제나 '실천적 사랑의 중요성과 그 실현 방안에 대해 논술하라' 는 이화여대 인문계 논제등 여러 대학에서 출제됐었다.

이 작품에는 호색한인 카라마조프가의 아버지 표도르, 금욕적인 아들 알료샤, 지성적인 무정부주의자 이반, 수도사인 조시마, 세속적인 그루셍카 등 19세기말 러시아 사회를 대표하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 인물들을 통해 다루고자 하는 것은 바로 선과 악의 문제다.

아버지 표도르의 살해로 시작된 이 작품은 인간의 내면속에 모순적으로 존재하는 선과 악, 우직함과 교활함, 순결과 음란을 대비시키면서 결국 신에 대한 형이상학적 문제로 접근한다. 이 과정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등장하는 논변이 '신정론' .지상에는 인간이 괴로워해야할 수많은 악과 죄가 존재한다.

'어째서 인간은 악을 행하도록 어용되는가.

' 이런 의문에 이어 신에 대한 고발로 이어진다.

'과연 신이 선하다면 어떻게 하느님의 죄없는 자녀가 눈물과 가련한 희생자의 괴로움을 겪도록 하는가.

' 선과 악의 운명적인 순환의 고리가 결국 신에 대한 허무주의적 태도로 나아간다. 그러나 이런 허무함 속에서도 신에 대한 긍정을 바탕으로 인간에 대한 사랑과 자기희생 등 휴머니즘을 통해 그 순환의 고리를 넘어선다.

여기에서 지성적 반성이 개입될 수 있는 주제는 크게 세가지다.

▶인간이란 과연 선한가 아니면 악한가라는 인간본성에 대한 형이상학적 질문 ▶신정론을 바탕으로 선.악과 신 (神) 의 관계에 대한 물음 ▶휴머니즘의 실현가능성에 대한 논변이 그것이다. 이중 신정론과 휴머니즘에 대한 논변은 서강대와 이화여대에서 출제된 주제다.

문제는 이 작품의 논변들이 상당한 정도의 철학적 지식을 배경에 깔고있기 때문에 작품 자체를 이해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는 점이다. 따라서 철학적 배경지식이 없이 논술을 작성할 경우 자칫 잘못하면 지성적인 글보다 수필에 가까운 글이 될 가능성이 많다. 따라서 인간본성론.신정론.휴머니즘등에 대한 다양한 입장의 논쟁적 논변을 익혀두는 것이 고전을 제대로 읽고 좋은 논술을 쓰는 첩경이다.

김창호 학술전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