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칼럼] 할머니와 손녀까지…가족이 경영하는 이색 골프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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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서 뮌헨은 대략 600km, 1500리가 넘는다. 하루를 온전히 길 위에서만 보내는 것은 억울한 일이다. 그래서 중간 기착지로 Numberg(뉘른베르크)를 잡았다.

뉘른베르크는 고성가도에 위치한 뼈대 있는 중세 도시다. 일찍이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합리적이고 계산 빠른 상업 마인드로 제국도시의 옛 모습을 지켜낸 곳으로 유명하다. 이를테면 주변에서 전쟁 기미가 보이면 상인들이 주변 도시들을 돈으로 매수하여 전쟁을 막았고, 성 안에 깊은 우물과 식량창고를 마련하여 성이 포위되더라도 그 안에서 몇 달을 유유자적 버텨내면서 오히려 포위한 적들이 지쳐 물러나게 만들고, 유럽에서 우상 타파를 외치며 각종 성물들을 부숴버리던 시절엔 ‘이 아까운 것들을 왜 부숴. 성당 안에 감춰’ 그리하여 엄청난 문화재와 아름다운 건물들이 역사의 비바람을 피할 수 있었다는 현명한 상인들의 도시. 현재까지도 그 후손들이 세계적인 완구박람회나 크리스마스마켓을 통해 뉘른베르크의 이름을 날리고 있다.

하지만 우리에겐 계획 없이 들른 도시였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떼우는 식사에도 지쳤고(아우토반 휴게소는 특이하게도 고속도로 상공에 위치하고 있었다. 덕분에 상행선, 하행선이 하나의 휴게소를 공유할 수 있는 실용적 시스템이었다. 아우토반 중앙선 상공에서 스테이크를 써는 스릴도 있고…), 하루 종일 아우토반에서 가속 페달을 밟느라 고생한 엄지 발가락에게도 휴식을 줘야 했다. 네비게이션으로 근처 골프장 물색에 들어갔다. 스토리가 있는 골프장을 찾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그저 아무 골프장이나 묻지마 관광식으로 들러볼 생각이었다. 뉘른베르크에서 30분 거리 교외에 Golfanlage Gerhelm이라는 골프장을 찍었다.

삭막한 고속도로를 빠져 나와 시골길에 접어드니 숨통이 트이는듯 했다. 독일의 숲은 은근 매력이 있다. 일단 규모감이 있고 선이 굵은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무엇보다 차를 대고 쉬어갈 수 있는 숲 속 휴게 공간은 어느 나라도 따라갈 수가 없다.


네비게이션이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렸지만 한참을 기웃거렸다. 창고로 보이는 커다란 목조 건물 벽엔 각종 목조 농기구들이 걸려 있었다. 흡사 소 달구지나 코뚜레를 연상시키는 수준의 농기구들이었다. 분명 건물 너머로 코스는 보이는데 어디가 클럽하우스인지… 쭈뼛거리고 있을 무렵 라운드 복장의 할아버지 한 분을 따라 프로샵을 찾을 수 있었다.

알고 보니 특이한 골프장이었다. 골프장을 완벽한 가족 경영 체제로 운영하고 있었다. 캐디마스터는 아버지가, 레스토랑 매니저와 주방장은 어머니가, 웨이츄리스는 두 딸이, 프로샵은 아들이 각자 역할 분담을 해서 18홀을 운영해 나간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였다.

원래는 아버지가 양을 키우던 목장이었지만 목축만으로는 생계가 빠듯하여 10년 전쯤 큰 맘 먹고 양을 모두 팔아 버리고 그 목초지에 골프장을 만들었다고 했다. 처음엔 시험 삼아 9홀만 운영했는데 근처에 골프장이 없어 의외로 많은 멤버들이 모였고 결국 탄력을 받아 18홀로 확장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골프장을 만들기 위해 스코틀랜드까지 몸소 방문하셨고, 전리품으로 구입해온 앤틱 골프채와 골프 스타들의 몇 가지 기념품들을 클럽하우스에 자랑스럽게 비치해 놓으셨다. 아들은 독일에서 열리는 BMW 골프대회에서 받아온 사인들을 자랑스럽게 보여주었다. 하지만 딸은 불만이 있는 모양이었다. “가족들과 일해서 좋겠어요.” 맥주 서빙을 온 딸에게 물었더니, “뭐… 별로… 좋지 않아요.” 뭐 씹은 듯한 그 표정과 제스쳐는 분명 어머니에게 한 소리 듣고 일하는 모양새였다.

빽빽한 숲이 품고 있는 코스는 양떼들이 풀을 뜯는 부드러운 언덕 자체였다. 레이아웃은 정통 스코틀랜드 스타일과 미국식 코스의 느낌이 혼재하고 있었다. 페어웨이나 그린의 관리 상태는 비교적 훌륭했다. 주중 40유로, 주말 50유로의 저렴한 골프장 치고는 재미있는 요소들을 많이 갖고 있는 코스였다.

막 팀으로 나간 우리가 16홀에 이르렀을 때, 코스엔 이미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어디선가 카트 한 대가 나타나더니 우리를 따르고 있었다. 꽤 쌀쌀해진 날씨 때문인지 바람막이에 장갑까지 끼고 카트를 몰고 등장하신 정체 모를 할머니. 우리가 티오프를 마치자 얼른 티박스에 올라가 여기저기 부러지고 버려진 티를 줍고, 휴지통을 비우고 티잉 그라운드를 정리하셨다. 그리고 그린에서 홀 아웃하기를 기다려 깃대를 걷어 카트에 싣고 하루 동안 생긴 디봇을 정리하셨다. 그러고 보니 골프장 가족 경영체제의 최고봉, 오너이자 코스 관리자인 할머니가 귀한 모습을 드러내신 것이다.

이다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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