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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가 칼뱅 탄생 500주년…후예들 언론자유 억압 아이러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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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올해는 종교개혁가 칼뱅(1509~64) 탄생 500주년을 맞는 해다. 그의 신학을 중심으로 성립한 개신교 교파가 장로교다. 청교도 시인 존 밀턴(1608~74)은 젊은 날 유럽 여행을 하던 중 칼뱅이 신정정치를 펼쳤던 스위스 주네브(제네바)에 들렀다. 1639년 5월 말이었다. 밀턴에게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본고장 주네브 방문은 일종의 ‘영적 귀향’이었다. 그는 이 도시의 학문 장려와 종교 연구, 그리고 예배에 찬사를 보냈다.

영국의 청교도혁명(1640~60)은 스튜어트 왕조의 종교적 전횡에 맞서 칼뱅의 후예인 장로파를 중심으로 한 청교도 세력이 ‘종교적 자유’를 쟁취하고자 일으킨 혁명이다. 밀턴은 혁명 초기에 장로파를 지지했다. 칼뱅 신학의 본산인 주네브에서 지냈던 경험이 상당 부분 작용했다. 그런데 혁명이 성공하자 혁명 실세인 장로파가 가장 먼저 취한 조치는 ‘출판허가법’의 제정이었다. 장로교 교리에 어긋나는 일체의 출판활동을 봉쇄하려는 의도로 검열제를 시행한 것이다.

장로파와 함께 폭정에 맞서 싸웠던 밀턴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장로파의 종교 자유 탄압은 혁명정신에 대한 명백한 배신이었다. 자유와 독립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겼던 밀턴은 장로파를 더 이상 동지로 보지 않게 되었다. 그가 장로파의 획일주의를 반박하기 위해 1644년에 쓴 책이 ‘언론자유의 경전’으로 불리는 『아레오파기티카』다(사진). 장로파의 배신은 역사상 최초로 표현의 자유를 천명한 한 권의 고전이 탄생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셈이다.

밀턴은 『아레오파기티카』에서 권력이 되는 순간 독선적으로 변질되는 종교의 속성과 관련해 주목할 만한 조언을 했다. 제2, 제3의 끝없는 종교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개혁’을 ‘The Reformation’ 대신 ‘reformation’이라고 썼다. 정관사를 없애고 소문자를 써서 종교개혁을 일회적인 사건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종교개혁은 낡은 껍질을 벗어 던지며 영구히 지속해야 하는 과제였다. 밀턴은 칼뱅이 비춰준 ‘섬광’을 너무 오래 쳐다봐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 빛은 ‘응시’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다. 섬광을 오래 쳐다보면 앞을 볼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칼뱅주의를 획일적 교리로 만들 것이 아니라 칼뱅이 비춰준 빛을 활용해 더 많은 진리를 발견할 것을 촉구한 것이다. 동양식으로 표현하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아니라 ‘달’을 보라고 한 밀턴의 조언은 지금도 타당하다.

박상익(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