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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나 하지 농구는 무슨…] 24. 유고 세계선수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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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 1970년 유고에서 열린 제6회 세계 남자농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한 한국대표팀. 뒷줄 맨 오른쪽이 필자, 맨 왼쪽이 신동파.

1970년 5월 제6회 세계 남자농구선수권대회가 유고에서 개최됐다. 한국팀 예선 경기가 열린 스플리트시는 인구 30만명의 아드리아해안에 있는 관광도시였다. 모두 13개국이 출전한 이 대회에서 한국은 브라질.캐나다.이탈리아와 한 조(B조)가 돼 예선 경기를 치렀다.

한국의 첫 상대는 브라질. 제3, 4회 대회 챔피언인 브라질은 막강한 전력을 보유한 장신팀이었다. 한국으로선 승리보다 점수 차를 얼마나 줄이느냐가 관건이었다. 이런 생각으로 나는 공격 제한시간(당시 30초)이 10초 정도 남았을 때 공격을 시작하는 '컨트롤 플레이'를 선수들에게 지시했다. 그런데 선수들이 마음을 비웠기 때문인지 던지는 족족 골인됐다. 7~8분까지 접전을 펼쳤다. '이 정도면 승부를 걸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9분쯤 작전타임을 불러 정상적인 공격을 주문했다.

주전센터 김영일이 전반에 5반칙으로 퇴장당한 것이 마음에 걸렸으나 최종규가 이 공백을 잘 메웠다. 이인표.신동파의 중거리슛도 호조를 보여 브라질을 추격했다. 종료 2분 전 점수는 75-77, 한국이 한골 차로 따라붙었다. 역전도 가능한 상황이었다. 이때 유희형이 브라질의 패스를 가로채 단독 레이업슛 기회를 잡았다. '동점이다'라고 생각한 순간 브라질의 가드가 유희형을 가로막았다. 두 선수가 함께 코트에 쓰러졌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아랍인 심판은 유희형에게 공격자 파울을 선언했다.

이때였다. VIP석에 점잖게 앉아있던 이병희 단장(당시 아시아농구연맹 회장 겸 세계연맹 부회장)이 윗옷을 벗어던지고 코트로 내려오더니 "×××! 심판 똑바로 보라"며 거칠게 항의했다. 경비의 만류로 관중석으로 되돌아가면서도 이 단장은 심판들을 향해 '주먹 떡'을 날리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한국은 이후 또 한차례의 결정적인 오심으로 77-82로 지고 말았다. 세계 농구사에 대이변을 일으킬 엄청난 기회를 놓치고 만 것이다. 다음날 현지 신문은 "한국이 오심으로 승리를 도둑맞았다"고 크게 보도했다.

하지만 이 경기를 계기로 우리 선수들은 "어떤 팀이든 대적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캐나다는 가볍게 뿌리쳤고,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선 김영일.최종규가 5반칙, 신동파.유희형.이인표.박한.이병국.이자영 등 여섯명이 4반칙을 기록할 만큼 격렬한 육탄전을 펼치며 추격했지만 아깝게 무릎을 꿇었다. 한국의 최종 순위는 공동 9위. 쿠바만 눌렀어도 세계 8강에 이름을 올려놓을 수 있었다. 지금도 아쉬움이 크다.

이 대회에서 한국은 농구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신동파는 B조 예선리그의 득점상을 받는 영예도 누렸다.

이미 국내외에서 득점의 달인으로 평가받던 신동파에게 이탈리아팀 관계자가 넌지시 프로 전향의사를 타진해와 현지 신문에 크게 보도되기도 했다. 그 후 파나마팀 코치였던 미국인도 내게 신동파의 미 프로농구(NBA) 진출을 주선하겠다고 제의했다. 그는 당시 NBA 선수의 연봉이 최소 1만5000달러라고 설명했다. 성적에 따라 4만~5만달러도 받을 수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신동파의 프로행은 국내외 여러 사정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나는 세계선수권대회를 치르며 "세계의 벽이 결코 높지 않다"는 자신감을 얻었고, 그해 12월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다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김영기 전 한국농구연맹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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