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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L로 15.1㎞ … 미국발 연비 태풍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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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뉴스 분석  19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백악관의 로즈 가든에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자동차 업계 관계자들이 모였다. 미국 정부가 강화된 자동차 연비·배기가스 규제안을 발표하는 순간이었다. 모두 박수를 쳤지만 차 업체 임원들의 표정은 밝지만은 않았다. 환경운동가들과의 수십 년 싸움이 결국 패배로 끝난 셈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의회의 법안 제출을 온몸으로 막았던 GM·포드 등은 이번엔 무기력했다.

규제안에 따르면 2016년까지 미국에서 팔리는 모든 자동차는 L당 평균 15.1㎞(갤런당 35.5마일)의 연비 기준을 맞춰야 한다. 배기가스 배출량 역시 지금보다 3분의 1 정도 줄여야 한다. 차종별로 승용차는 L당 16.6㎞, 소형 트럭은 12.8㎞가 기준이다.

뉴욕 타임스(NYT)는 20일 이번 조치를 “대통령의 깨끗한 한판승”이라고 보도했다. 연비 규제 관련 법안은 당초 오바마 대통령이 상원의원 시절 직접 제출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기세등등하던 자동차 빅3가 경기 침체로 ‘이빨 빠진 호랑이’ 신세가 된 틈을 타 숙원 사업을 밀어붙인 것이다.

이번 조치로 미국 차 업계는 연비가 좋은 고효율의 엔진을 개발하는 게 발등의 불이 됐다. 고효율 엔진이 장착된 만큼 소비자도 2016년엔 차를 살 때 대당 평균 1300달러를 더 내야 할 전망이다. 장기적으론 미국 차 산업을 살리기 위한 ‘고육책’이란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전 세계가 온실가스 배출 규제에 동참하는 상황에서 결국 미국 차 업체를 중무장하기 위한 조치”라고 평했다.

◆한국 업계 영향=현대·기아차가 미국에 수출하는 차 가운데 새 연비 기준을 맞추는 차종은 하나도 없다. 올 하반기 미국에 출시될 기아차 포르테 가솔린 5단 수동(L당 16.1㎞)이 겨우 이 기준에 근접하고 있다. 포르테보다 연비가 더 좋은 차종으로는 소형 디젤 차량이 있지만, 미국의 대기환경 기준에 걸려 수출을 못한다.

연비가 좋은 차를 생산하는 기술을 갖추고 있는 일본 업체들이 이번 규제의 최대 수혜자가 될 것으로 보인다. 도요타·혼다는 이미 하이브리드카와 소형 차 상당수가 새 연비 기준을 맞추고 있다. 유럽의 폴크스바겐은 지난해 개발한 친환경 디젤 엔진이 새 연비 기준을 웃도는 연비를 낸다. 고급 차가 주력인 벤츠·BMW·아우디 역시 현대·기아차보다 앞선 친환경 디젤 엔진을 개발해 놨다. 친환경차 개발에 상대적으로 뒤진 현대·기아차엔 위기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현대·기아차는 하이브리드카 수출을 늘리고, 차량 무게를 줄여 연비를 높이겠다는 전략이다. 소형 차인 베르나의 미국 공인 연비는 L당 12.8㎞로 남은 기간 동안 L당 4㎞가량을 향상시켜야 한다. 현대차는 2011년 쏘나타 하이브리드를 미국에 내놓을 계획이다. 과연 특허를 선점한 도요타의 기술을 피해 좋은 차를 만들 수 있을지, 차량 경량화에 성공할지 등에 한국 차의 운명이 걸린 셈이다.

김태진·김필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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