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화 약세 덕에 ‘영양가’ 없이 외형만 성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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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열심히 팔았지만 환율로 까먹는 바람에 남긴 게 별로 없다. 지난해 우리 기업의 성적표를 요약하면 이렇다.

2008년 원화가치는 달러당 평균 1102.6원. 2007년의 929.2원과는 19% 차이가 난다. 특히 지난해 11월 24일 원화가치가 달러당 1513원까지 하락했고, 이어 1400원대에서 상당 기간 머문 것을 감안하면 환율 효과는 기업의 수익성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은행이 법인기업 7097개를 대상으로 조사해 20일 발표한 ‘2008년 기업경영분석’에도 원화가치의 하락에 따른 부정적 효과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조사 대상 기업들이 지난해 입은 환차손은 55조7000억원으로 전년보다 714.3% 급증했다. 환차익도 47조7000억원에 달했지만 손실이 더 컸다. 환차손은 원화가치의 급락으로 선물환, 키코 등 파생상품 거래에 따른 손실이 크게 불어났기 때문이다.

예컨대 달러당 1000원일 때 추후 원화가치의 상승(환율 하락)을 예상하고, 한 달 후 들어올 달러를 미리 950원에 팔았던 기업은 실제로 원화가치가 1100원으로 하락할 경우 달러를 1100원이 아닌 950원에 팔 수밖에 없다. 환차손이 발생하는 것이다. 또 키코 거래에서 원화가치가 달러당 1200원대를 넘어서면 당초 약정금액의 두세 배를 물어주기로 한 키코 계약이 많았는데 원화가치가 급락하면서 기업의 손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환차손 등 영업외 부문에서의 비용이 크게 늘면서 기업의 수익성은 직격탄을 맞았다. 수익성을 나타내는 매출액 영업이익률(매출 대비 영업이익 비중)은 2007년 5.3%에서 지난해엔 5.0%로 0.3%포인트 하락했다. 기업들이 실제 올린 이익을 보여주는 매출액 세전 순이익률도 전년의 5.5%에서 2.9%로 절반 가까이 떨어졌다. 이는 기업들이 1000원어치를 팔아 29원을 벌었다는 뜻으로, 2001년(1.7%) 이후 가장 낮다.

지난해 기업의 매출은 1995년 이후 가장 높은 19.1%의 증가율을 보였지만, 이것도 뜯어보면 밝은 면만 있는 게 아니다. 순수하게 물량이 늘어서가 아니라 원자재 가격 상승과 원화가치 하락에 따른 가격효과가 상당 부분 작용했다. 특히 제조업의 매출액이 20.8%나 늘면서 1987년 이후 21년 만의 최고 신장세를 보였다. 비제조업의 매출도 17.5%가 늘었다.

박진욱 한은 기업통계팀장은 “기업들의 매출액이 늘어난 것은 물량이 증가했다기보다 환율 상승과 제품가격 상승 등 가격요인이 크게 작용한 것”이라고 말했다. 수출물량은 늘지 않더라도 달러당 원화가치가 1000원에서 1400원으로 하락하면 매출이 400원 늘어나는 효과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벌이가 좋지 않다 보니 금융권에 손을 내미는 기업이 늘면서 기업의 재무구조도 크게 나빠졌다. 지난해 말 현재 기업들의 부채비율은 130.6%를 기록, 전년보다 14.5%포인트나 치솟았다. 이는 2003년(131.3%) 이후 가장 높다.

빚이 많아지자 이자 등 금융비용도 늘면서 영업이익으로 금융비용을 부담할 수 있는 능력을 나타내는 이자보상비율(영업이익/이자비용)은 전년의 363.2%에서 322.9%로 40.3%포인트 하락했다. 영업이익으로 이자비용도 내지 못하는 이자보상비율 100% 미만인 업체의 비중도 지난해 39%로, 전년의 37.9%보다 늘어났다.

김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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