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행의 옴부즈맨칼럼]부각 안된 대통령 즉석회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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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지난주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이 김종필 (金鍾泌) 총리서리 임명후 가진 기자간담회는 종래의 관례에 비추어 그야말로 파격 (破格) 이었고 공식회견이나 진배없는 것이었다.

사실 여태까지의 대통령기자회견이라면 으레 여러가지의 사전적인 준비와 절차가 있었고 그에 따른 우여곡절 또한 있게 마련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런 준비나 절차 없이 회견이 이뤄짐으로써 신선한 이미지를 더욱 부각시킨 느낌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번 회견은 대통령으로서의 첫 회견이나 진배없는 것인데도 구태여 형식이나 절차에 구애받지 않고 그것을 해냄으로써 새로운 관례를 만드는 계기가 됐다고도 지적된다.

물론 준비란 측면에서 보면 기자를 만나겠다는 대통령의 마음먹기와 자신감이 '준비' 를 충족시키고도 남는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기자의 입장에서 보면 준비의 충족을 채울 수 없는 개연성을 지니는 것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대통령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는 언제든지 기자간담회가 이뤄진다면 당연히 거기엔 기자들의 항재 (恒在) 적인 준비가 있지 않아서는 안될 터이다.

대통령과 언론의 이런 관계는 어떤 의미에서든 매우 바람직한 것이다.

미국의 백악관처럼 수시로 기자회견이 이뤄지는 그런 상황이 전개된다면 그것은 비단 우리나라 정치의 역사에서뿐만 아니라 언론의 역사에서도 하나의 전기 (轉機)가 되리라고 믿어 마지 않는다.

한데 백악관의 경우와 우리의 처지를 생각할 때 그 차이는 어디에 있으며, 우리가 할 수 있거나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는 곰곰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이것은 물론 권력과 언론의 기본틀과도 관련된 것이긴 하지만 일차적으로 그것을 이뤄내는 시발은 권력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언론측의 자세가 마냥 부차적인 것으로 경시돼야 할 까닭은 전혀 없다.

이런 점에 비춰 언론의 자세는 특히 취재방식이나 이른바 출입기자의 운용 등 여러가지 측면에서 근본적으로 커다란 변화 내지는 개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간과해선 안될 줄 안다.

가령 백악관의 기자회견 광경을 보면 백발이 성성한 노기자 (老記者)가 흔히 자리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오랜 세월 전문적으로 백악관 취재에 임했던 기자가 주류 (主流) 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백악관을 취재하는 양식 (樣式) 또는 양상 (樣相) 을 타산지석 (他山之石) 으로 삼는다면 거기에는 천직 (天職) 으로서의 기자가 무엇인지, 그리고 전문직으로서의 기자가 무엇인지에 대한 명확한 해답이 나올 줄 믿는다.

비단 백악관 출입기자뿐만 아니라 어느 분야의 기자이든간에 전문성이 우선하고 거기에 따른 취재력과 문장력이 뒷받침되지 않고는 기자로서의 존재가치가 거의 없다는 이야기다.

물론 기자의 능력이나 전문성이 반드시 나이와 경력만으로 좌우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능력있는 젊은 기자가 경험 많은 선배보다 월등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능력이 경험에 뒷받침되는 것처럼 바람직스런 것도 없지 않을까 싶다.

내가 이런 점을 새삼스럽게 지적하는 까닭은 특히 두 가지 점에 연유한다.

첫째는 지난주에 있었던 金대통령의 기자간담회 내지는 회견에 의미를 부여한 신문이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는 점에서다.

물론 김종필 (金鍾泌) 총리서리 임명에 따르는 상황전개와 조각발표 내용에 비중을 뒀다는 측면에서 보면 그런 회견은 의미를 구태여 부여할 필요가 없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회견을 필요에 따라 수시로 갖겠다는 뜻과 함께 그것이 시작됐다는 사실을 제대로 지면 (紙面)에 반영해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둘째는 이번 새로운 정부구성에서 고희 (古稀) 를 넘긴 대통령과 국무총리서리가 팀을 이룬 것도 우리나라 역사에는 처음 있는 일인데도 그것을 제대로 짚고 풀이한 신문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정치인이 대거 입각한 것도 4.19 이후의 장면 (張勉) 내각 이후로는 거의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는데, 고작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나눠먹기 인사 정도로 신문이 풀이했다는 것은 아쉽기 그지 없는 일이었다.

정치란 유기체 (有機體) 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변화의 의미가 크다는 점에 비춰 더욱 그런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다.

지난주의 총리서리체제와 관련된 기사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특징의 하나는 우리나라 대부분의 신문들이 아직도 양비론 (兩非論) 내지는 양시론 (兩是論) 의 논지와 보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은 물론 오랜 세월에 걸쳐 체질화된 것이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극복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권위주의체제 아래서 어쩔 수 없이 A도 나쁘고 B도 나쁘다는 '양비' 의 논지를 폈거나 A도 일리 (一理) 있고 B도 일리 있다는 '양시' 의 논지를 편 것은 이해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민주정치를 꽃피우는 오늘의 시대상황에서 아직도 그런 체질을 벗지 못할 까닭이 어디에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가령 국회에서 벌어진 국무총리임명동의안 처리의 소용돌이만 하더라도 사실보도에 못지 않게 신문들이 시비 (是非) 를 분명히 가리는 논지를 강력하게 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옳고 그름을 가린다는 차원에서 보면 사실보도일지라도 여당과 야당의 주장을 신문이 같은 크기로 편집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런 균등은 오히려 불균등일 뿐이며 정도 (正道) 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규행〈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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