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춘객들 정동진서 시낭송회…파도가 들려준 새봄 새희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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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바다는 안정의 자세로 계절을 맞는다.

푸른 가슴을/잔잔히 재우고 들먹이지 않는다.

/…우리들 귀에서 사라지지 않는/푸른 대지의 영혼. /바다는/육지처럼 매양 같지만/푸르게 펼쳐진/우리의 의지가 있다."

바다는 흔들리지 않는다.

세상이 아무리 변덕을 부려도 이탄 시인의 위 시 '바다에는 아무것도 없다' 에서처럼 침묵의 의지로 세월을 견뎌낸다.

박제천.강우식.이탄.김여정.유안진.고명수.김경실.김영남씨 등 시인 50여명은 지난달 28일 문학아카데미 (대표 박제천)가 주최한 시낭송회를 위해 강원도 정동진으로 떠났다.

바다로부터 새 봄 새 희망을 배우기 위해서다.

꿋꿋이 찬바람을 견디고 있을 '모래시계' 의 해송 (海松)에게 전해줄, 예년보다 보름쯤 일찍 왔다는 봄 소식도 함께 가지고 출발했다.

하지만 동해의 겨울은 아직 안끝났다.

다른 곳보다 일찍 도착한다는 겨울은 늦게까지도 자리를 피해주려 하지 않았다.

서울을 떠난지 4시간만에 버스는 대관령에 가로막혀 멈춰서고 말았다.

쌓였던 눈이 바람에 날리며 만들어내는 '설무 (雪霧)' 에 갇혀 있을 때 한 시인의 시선이 흰 꽃을 피운 개나리를 발견했다.

그리고 한마디의 말. "저렇게 눈에 덮여 있어도 곧 노랗게 봄을 노래하겠지!" 버스는 조금씩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고 어둠이 짙어질 무렵엔 대관령 마루를 넘어서고 있었다.

결국 8시간만에 강릉에 도착할 수 있었고 시낭송회는 오후8시30분 정동진역 앞 한 카페에서 시작됐다.

서울에서 온 시인들과 함께 홍승자.최명길.이충희씨등 강릉지역의 시인들도 한데 어우러졌다.

"겨울이 다른 곳보다 일찍 도착하는 바닷가/그 마을에 가면/정동진이라는 억새꽃 같은 간이역이 있다.

/계절마다 쓸쓸한 꽃들과 벤취를 내려놓고/가끔 두 칸 열차 가득/조개껍질이 되어버린 몸들을 싣고 떠나는 역. " 김영남씨는 최근 펴낸 시집 '정동진역' (민음사刊) 의 표제시에서 이 역을 '억새꽃 같은 간이역' 으로 읊고 있다.

해와 바다와 봄 시를 낭송하며 민족의 꿋꿋한 앞날을 위해 시를 바칠 것을 다짐한 낭송회는 밤 10시 넘어서야 끝났다.

시에 대한 갈증만큼이나 강렬해진 육신의 배고픔을 안고 식당으로 향하던 시인들은 밤하늘에서 별들을 발견했다.

"낮에는 그렇게 진눈개비가 세찼다던데…. " 해돋이를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은 잠을 작파하고 긴 술자리를 예고하고 있었다.

동녁에 새벽 기운이 희붐하게 돌자 시인들은 바닷가로 나갔다.

아직 새벽 바람이 맵차기만 한 그곳에는 이미 5천여명의 인파가 몰려 있었다.

광화문에서 해가 뜨는 동쪽 방향으로 한반도의 끝에 자리잡은 곳. 우리 사회에 민주화를 가져다 준 광주항쟁을 다루었던 '모래시계' 의 배경 정동진에서 해돋이를 보며 새 희망을 찾으려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태양은 어렵사리 찾아온 사람들이 무색해 할 정도로 너무도 태연하게 떠올랐다.

눈길을 헤치고 봄소식을 가져온 사람들에게 정동진은 일출로 보답한 것이다.

시인들은 저마다 냉혹한 시절의 아픔을 달래줄 햇살을 사람들에게 전할 준비를 할 것이다.

어둠을 이글이글 삶아먹는 동방의 정열과 의지로 언 가슴들을 밝히고 녹일 것이다.

돌아오는 길엔 얼어 붙었던 대관령도 환히 열려 이제 동녁 바다로부터의 봄길을 열고 있었다.

정동진 = 양지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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