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한국 경제는 아직도 배가 많이 고프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14호 02면

경제에 훈풍이 불고 있다고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실물경제 회복은 둘째 치자. 국제금융 시장의 불안조차 끝나지 않았다. 지난달 국제통화기금의 ‘글로벌 금융안정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의 부실 채권 규모는 2조7000억 달러다. 이 중 9000억 달러만 상각 처리됐을 뿐 나머지 1억8000만 달러가 뇌관으로 남아 있다. 그렇다고 몇 달 전까지 회자되던 100년 만의 대공황이나 자본주의 종말이 온다는 건 아니다. 이런 위기는 지나갔다. 우리 앞에 놓인 건 전에도 여러 차례 겪었던 불황과 경기 침체 수준의 위기다. 숨 돌릴 여유가 생겨서인지 ‘위기 이후’를 논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다시 위기를 맞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특히 외환위기 방지책이 활발히 제시되고 있다. 이번에도 아슬아슬했던 순간들을 여러 차례 넘겼기 때문이다.

김영욱의 경제세상

별것 아닌 미네르바 사건이 그토록 확대된 건 이런 위기감에 기인한 바 컸다.

외환은 규제론이 힘을 얻고 있다. 환란 이후 해답으로 떠올랐던 ‘외환보유액 많이 쌓기’가 정답이 아닌 게 입증돼서다. 위기 때 외화가 유출되는 걸 줄이거나 차단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환율제도를 1980년대의 복수통화바스켓제나 90년대의 시장평균환율제로 되돌리자는 주장도 있다. 금융 규제와 감독은 훨씬 강해져야 하고, 정부 기능도 강화돼야 한다는 얘기가 득세하고 있다. 시장과 개방, 자유화 같은 단어는 요즘 입 밖에 내기가 힘들 정도다.

그래서 그런 걸까. 한나라당 지도층의 인식도 달라지고 있다. 박근혜·정두언 의원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시장경제 반성론을 잇따라 제기했다. 그러면서 정부 기능 강화를 역설했다. 박 의원은 열흘 전 “정부 역할과 기능이 새롭게 구축돼야 하며 감독 사각지대가 있어선 안 된다”고 했다. 정 의원은 지난달 초순 “세계 모든 정부가 신자유주의가 맞지 않는다는 마당에 우리만 마냥 가서는 되겠는가”라며 “신자유주의를 되돌아볼 때가 됐다”고 했다.

정말 걱정된다. 신자유주의가 만능이라고 생각해서는 아니다. 시장이 모든 걸 해결해 줄 순 없다. 단지 정작 중요한 걸 못 보고 있는 게 아닌가 해서다. 바로 우리가 미국이 아니라는 사실 말이다. 미국은 신자유주의의 본산이다. 그런 나라이기에 위기의 원인을 거기서 찾고 반성하는 건 당연하다. 그들은 정부의 역할을 더 강조해야 하고 금융 시장도 더 규제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다. 신자유주의를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는 나라다. 규제 완화와 민영화를 그토록 강조해 왔지만 지금도 여전히 그게 국가적 과제다. 규제는 여전히 많고 민영화는 아직도 요원하다. 시장과 민간의 힘이 세졌다고 하지만 정부와 공무원의 힘에는 어림없다. 정부가 국가경쟁력을 갉아먹고 있고, 다른 나라보다 공동체 의식이 더 강한 나라이기도 하다. 양극화 역시 아직은 남보다 양호하다. 이런 터에, 그것도 보수 정당의 지도자가 정부와 규제, 공동체를 역설하는 건 크게 잘못됐다.

게다가 남들이 정부와 규제를 역설하고 있는 지금이 우리에게는 외려 찬스 아닐까.
낙후된 금융산업 경쟁력을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릴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해서다.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이 금융산업을 위기의 주범이라며 옴짝달싹 못하게 죌 때 우리는 정반대로 규제를 확 푸는 쪽으로 가야 한다. 미국보다 더 많이 개방하고 자유화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해외에도 적극 진출하고 산업자본도 거느리는 등 영토 경쟁에 활발히 참여해야 한다. 당연히 금산분리 완화는 필수다. 9% 지분 제한으로는 어림도 없다. 제조업체든 누구든 자유롭게 뛰어들 수 있어야 강한 금융이 된다. 그래야 세계적인 수준의 제조업과 금융을 경제의 두 바퀴로 삼아 굴러가는, 세계에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박 의원의 시장 반성론이 못내 안타까운 건 그래서다. 한국 경제는 아직도 배가 많이 고프다는 걸 모르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착각과 미망에서 서둘러 벗어나야 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