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善業을 지어라, 자신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은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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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호 14면

김제원 교무 원광대와 원불교대학원대학을 나와 원불교 원남교당, 전남 청소년수련원, 광주교당 등을 거쳤다. 지금은 안암교당 주임교무를 맡고 있다. KBS라디오 한민족방송 ‘종교와 인생’ 프로그램에서 강의하고 있다.

14일 원불교 안암교당의 김제원(44) 교무를 만났다. 그는 젊다. 청년들에게 인기가 많다. 그가 주임교무로 온 뒤 교당의 청년반 학생들이 몇 배로 늘었다. 비결이 있다. 청년 교화도 그는 ‘마음 공부’에 초점을 맞춘다. 목마름의 뿌리를 축여 주는 식이다. 그런 김 교무에게 ‘가슴에 꽂고 사는 한 구절’을 물었다. 그는 원불교 교전에서 한 대목을 뽑았다.

영혼을 울린 한 구절-원불교 안암교당 김제원 교무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모든 사람에게 천만 가지 경전을 다 가르쳐 주고/천만 가지 선(善)을 다 장려하는 것이 급한 일이 아니라/먼저 생멸 없는 진리와 인과 보응의 진리를/믿고 깨닫게 하여 주는 것이 가장 급한 일이 되느니라.”

-내 삶에서 가장 급한 일, 왜 그걸 알아야 하나.
“진정한 행복과 직결되니까. ‘내가 참으로 행복해지는 게 뭔가’. 그것과 같은 물음이다.”

-행복이면 행복이지, 진정한 행복은 뭔가.
“지금의 행복이 어떤 행복인가. 죽어서 관 속에 누워서도 미소 지을 수 있는 행복인가. 그걸 따져 봐야 한다. 그래야 후회 없는 인생을 살 수 있다.”

-천만 가지 경전, 천만 가지 선(善)을 알리는 게 왜 급한 일이 아닌가.
“그건 지엽적이고 일회적인 일이다. 나무로 치면 가지일 뿐이다. 경전과 선(善)이 어디서 나오나. 그 뿌리를 찾아야 한다.”

-그 뿌리가 어디인가.
“생멸 없는 진리와 인과 보응의 진리다.”

-생멸 없는 진리.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진리가 대체 뭔가.
“이 육신은 생멸이 있다. 그러나 ‘참나’는 다르다. 그 영혼은 불생불멸이다. 그래서 영생이다.”

-그 참나를 찾으면.
“나 없는 나, 나 있는 나를 알게 된다. 아울러 털끝만큼도 틀림이 없는 인과도 알게 된다. 그래서 아주 적극적으로, 아주 능동적으로 선업(善業)을 짓게 된다. 더구나 그 선업에 흔적이 남지 않게 된다.”

-만약 선업에 흔적이 남으면 어찌 되나.
“내가 지었다고 하면 그게 흔적이다. 그래서 안 알아주면 섭섭해한다. 사람들은 대개 ‘있는 내’가 지은 바 있게 짓는다. 그게 아니다. ‘없는 내’가 지은 바 없이 지어야 한다. 사람들은 베풀 때 망설인다. 그러나 내가 없으면 얼마든지 상대에게 먼저 베풀 수 있다. 그래도 인과가 있어서 베푼 것은 그대로 돌아오게 마련이다.”

-인과의 이치를 알면.
“인과의 이치를 믿기만 해도 자력적 조절이 시작된다. 전에 없던 두려움이 생기고, 다시 한번 멈추게 된다. 그래서 한번 더 생각하게 만든다. 그렇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된다. 그래서 참회도 하게 된다.”

김 교무는 생멸 없는 진리와 인과 보응의 진리, 그게 원불교의 일원상(一圓相)이라고 했다. “생멸 없는 자리를 수행의 자리라 하고, 인과 보응의 자리를 신앙의 자리라고 한다. 그래서 수행과 신앙을 병행할 수밖에 없다. 하나로 말하면 일원상인데 그게 둘로 나뉘는 것이다.” 그래서 원불교는 수행의 종교와 신앙의 종교를 나누지 않는다고 했다.

-수행과 신앙, 왜 둘 다 필요한가.
“수행을 통해선 내가 직접 땅을 밟고 간다. 그러나 밟지 않은 땅에 대해선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믿어야 한다. 그게 신앙이다. 내가 밟지 않은 땅에 대해선 신앙으로 간다. 그래서 먼저 믿고, 깨달으라고 했다.”

-그런 믿음이 없으면.
“깨달음이 늦어진다. 그뿐만이 아니다. 삶에 대한 조절력과 실행력도 갖추기 어렵다.”

-수행과 신앙, 둘은 어떤 관계인가.
“수행만 강조하면 자기 관리 위주로 흐른다. 타인과, 세상과의 관계에서 복을 짓지 않게 된다. 또 신앙만 강조하면 자기 관리가 약해진다. 외적인 불공은 되는데 내적인 마음 공부가 약해 인격적 하자가 생긴다.”

-사람들은 일상에 쫓긴다. 가장 급한 일을 알아도 자꾸 뒤로 미룬다.
“그동안 내가 속고 살았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럼 밀렸던 순서가 제자리를 찾게 된다. ‘한창 울고 났더니 제정신이 들더라’ 하는 말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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