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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에게 띄우는 편지]"IMF 조기졸업 낙관은 버리십시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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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오늘 시점에서 여론조사를 한다면 새 대통령께서는 지난번 대선에서 보여줬던 40만표 미만의 근소한 득표마진보다 몇갑절 불어난 지지도 상승을 확인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광복이래 초유의 여야 교체에 따른 불안심리가 가라앉고, 그간 당선자로서의 행보를 지켜보면서 새 대통령에게 기대하는 민심이 두터워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취임 초기, 새 대통령께선 전 정권의 실정을 빌미삼아 보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조만간 대통령직이 갖는 책임의 무게는 피할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취임 초기 치솟았던 지지도가 퇴임시에 바닥으로 떨어진 전임자의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개혁' 과 '사정' 을 줄기차게 외쳤으면서도 좌초하고만 전 정권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합니다.

전임자는 아무리 선의로 시작한 일도 사람을 바로 쓰지 못하고, 민심을 바로 읽고 추스르지 못하면 실패로 끝난다는 교훈을 남겼습니다. 저는 새 대통령께서 멀리 역사의 과녁을 겨냥하심에 있어 다음의 열가지 고언을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지난날의 선거공약을 선별해 채택하기 바랍니다.

선거열기 속에서 광범한 계층의 유권자를 의식해 편성한 대다수 공약들은 재원상의 제약으로 실현가능성이 작거나 상충된 것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국가 최대의 당면과제인 경제위기 극복에 초점을 맞춰 국정과제를 몇가지로 압축해 국력을 집결시켜야 합니다.

다행히도 유권자는 선거공약을 그대로 믿지 않을 만큼 성숙해 있습니다.

둘째, 국제통화기금 (IMF) 구조조정 요구사항은 신임 대통령에게 걸림돌이자 지렛대로 작용할 것입니다.

제한된 재원이 부채탕감이나 조세감면.사회복지 확대 등 '대중경제' 식 발상의 정책을 펴기에는 걸림돌이 되겠지만 금융.기업.노동 등 각 부문의 효율성.유연성을 끌어올리는데는 지렛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미 노사정 (勞使政) 합의를 끌어내는데 주효하지 않았습니까. 셋째, 전임자는 인사가 '만사 (萬事)' 라더니 인사 때문에 망사 (亡事)가 됐다는 혹평을 받고 있습니다.

연합정당의 지분요구를 감안한다면 신임 대통령의 인사재량권은 제한될 것입니다.

여기에는 두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시대요청에 걸맞은 능력과 자질을 갖춘 인재를 활용하는 방식입니다.

문제는 인재의 능력을 판정하는 투명한 객관적 기준을 세우기가 어렵다는데 있지요. 다른 하나는 한국적인 방식, 즉 과거 정권들처럼 출신지역을 중시하는 방식입니다.

길고 어려웠던 야당생활중에 신세진 사람들이 많고 보면 이는 간단명료하게 빚갚음하는 길일 것입니다.

관계.기업계 등 각 부문에서 상당한 자리바뀜이 예상됩니다만 일정 기간 후에 반대의 물갈이 인사를 각오하면 됩니다.

두 방식중 어떤 배합을 택할 것인가가 관건이겠지요. 넷째, 취임전에 설치했던 몇몇 '위원회' 의 여러가지 정책구상들은 때론 돌출적.단편적이어서 전체를 수미일관하게 엮는 청사진이 실종된 느낌이었습니다.

정부조직개편이 대표적인 사례였습니다.

취임 즉시 각 분야 정책의 분명한 밑그림이 제시돼야할 것입니다.

다섯째, 정부관료조직의 장악력이 요청됩니다.

소규모 단순구조의 국민경제를 고도성장 궤도로 달리게 하던 기간에는 정부관료가 국민경제의 견인차였습니다.

국민경제의 규모 확대와 복잡한 구조, 그리고 국제개방화가 특징인 오늘날 관료의 정부규제는 오히려 민간경제활동을 옭아매고 있습니다.

관료는 기득권을 고수하려고 규제완화와 조직개편에 저항하는 기관이기주의를 발동하게 마련입니다.

정치인은 정보와 행정기술을 관료를 통해 배우게 마련이지만 그 과정에서 관료의 집단이기주의적 로비활동 덫에 걸리기 쉽습니다.

'졸작' 으로밖에 볼 수 없는 최근의 정부조직개편이 대표적인 결과일 것입니다.

여섯째, 재벌정책이 중구난방입니다.

'빅딜' 이라거나, 재벌은 '3~6개기업' 만 가져야 한다는 등 빈번하게 발표되는 지침들이 헷갈립니다.

자유시장 경제를 지향한다는 원칙을 존중한다면 금융기관의 책임경영체제 확립.상호지보금지.결합재무제표 작성 의무화 등으로도 재벌의 문어발 경영은 크게 제약될 것입니다.

시장경제원칙을 존중하고도 무능한 재벌의 경영퇴출이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일곱째, 노사정 합의로 한고비를 넘기긴 했으나 무리한 노조측의 요구에는 결연한 자세를 보여야 합니다.

앞으로 전임 노조원의 급여지급 문제 행방이 주목됩니다.

성역없이 '철밥통' 을 부수지 않고는 기업의 국제경쟁력이 강화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덟째, IMF시대의 난국을 1년반이면 극복할 수 있다는 낙관은 버려야 합니다.

단순히 보유외환의 유동성 부족 문제로 보아 쉽게 넘어갈 국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부실기업 등 실물경제 애로의 해소에는 대통령이 5년 내내 총력을 경주해도 부족하다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아홉째, 이런 관점에서 남북문제도 우선 우리의 경제난국을 넘긴 다음 튼튼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굵은 일만 직접 챙기고 잔일은 위임함으로써 심신의 건강유지에 최선을 다해 국정의 중단을 예방해야 합니다.

취임을 축하하면서 아울러 퇴임시 존경받는 대통령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김병주<서강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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