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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욕의 7개월’ 벗고 워싱턴 향해 제 목소리 낸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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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호 24면

지난해 10월 13일 세계는 금융패닉에 떨었다. 미국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의 파산 여파였다. 미국 뉴욕 월가와 영국 런던의 더 시티 등 글로벌 머니센터(금융 중심지)가 죽음의 공포에 짙게 드리워진 듯했다. ‘○○○은행이 위험하다는데…’라는 풍문이 나돌면 해당 금융회사는 파산할 판이었다. ‘이웃을 믿을 수 없는 순간’에 위험하다는 소문 자체만으로 자금이 이탈했기 때문이었다.

스트레스 테스트 이후, 월가의 반격

다급한 미국 정부가 극약처방을 들고 나왔다. 헨리 폴슨 당시 재무장관은 그날 오후 3시 월가 주요 금융회사 대표들을 재무부로 불러들였다. 천장이 높고 갈색 탁자가 놓인 재무부 회의실로 달려온 그들은 커피·콜라와 함께 놓인 1장짜리 문서를 보고 경악했다. 법적인 용어로 가득했지만, 내용의 핵심은 간단했다. ‘은행 지분을 정부에 파는 데 동의한다’는 것이었다. 폴슨 재무장관은 “서명을 해야만 이 방을 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

일부 금융회사 대표들이 반발하며 입씨름이 3시간 남짓 이어졌다. 하지만 그날 오후 6시쯤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죽음의 공포 앞에 장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루 뒤인 14일 미 정부가 구제금융 2500억 달러를 월가 대형 금융회사들에 투입했다. 공적자금 7000억 달러를 조성해 투입하기 전의 일이다.

그날 강하게 반발한 대표적인 인물은 바로 골드먼삭스의 로이드 블랭크페인과 JP모건체이스의 제임스 다이먼, 모건스탠리의 존 J 맥 회장이었다. 이들은 모멸감을 가득 안고 재무부 회의장을 떠났다. 뒤이어 보너스 규제와 스트레스 테스트(자본적합성 검사) 등이 그들을 옥좼다.

“정부 돈 돌려주겠다”
이달 7일 스트레스 테스트 결과가 발표됐다. 티머시 가이트너 미 재무장관은 “금융이 신뢰를 회복할 전기가 마련됐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프린스턴대 폴 크루그먼(경제학) 교수는 “이번 테스트의 의미는 금융회사들이 스스로 회생하길 기대하면서 금융위기를 그럭저럭 넘기기로 오바마 경제팀이 결정했다는 점”이라며 “이런 대충 넘어가기 전략이 일본 경제처럼 높은 실업률과 저성장이 장기화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크루그먼에 앞서 뉴욕대 누리엘 루비니(경제학) 교수는 “이번 어설픈 테스트 덕분에 살아난 금융회사들이 결국 좀비로 전락해 죽지도 않고 미 경제를 괴롭힐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번 테스트가 뜻밖의 결과를 낳고 있다. 블랭크페인(골드먼삭스)과 다이먼 (JP모건) 등이 목소리를 키우고 있다. 그들은 자사가 테스트를 통과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빨리 정부 돈(공적자금)을 되돌려 주고 싶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블랭크페인은 “보너스 규제를 받지 않고 은행을 경영하기 위해 정부의 공적자금을 상환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서는 왜 공적자금을 상환하고 싶어하는지 솔직한 속내가 그대로 드러난다. 카드회사 아메리칸익스프레스 케네스 체널트 회장도 가세했다. 그는 테스크 결과가 나온 직후 “2~3일 안에 공적자금 상환을 위해 재무부와 협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공적자금 규모가 34억 달러밖에 되지 않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되돌려줄 수 있다는 것이다.

블랭크페인 등이 물꼬를 트자 뱅크오브뉴욕멜런과 스테이트스트리트, US뱅코프, BB&T의 CEO 등도 공적자금 상환을 서두르겠다고 밝혔다. 심지어 자본을 새로 유치해야 하는 모건스탠리의 맥 회장도 공적자금 상환 의지를 공개적으로 밝혔다. 이어 “주식과 채권을 팔아 75억 달러를 조달했다”고 발표했다. 모건스탠리가 공적자금을 되갚고 추가 자본을 유치하는 데 필요한 118억 달러 가운데 60% 이상을 조달한 것이다. 나머지 43억 달러만 조달하면 미 정부 간섭에서 자유로워지는 셈이다.

미 금융 전문가들은 “스트레스 테스트가 믿을 만한지 논란이 일고 있다”며 “그러나 이들에게 테스트는 미 정부의 규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명분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심지어 “지난해 10월 구제금융 투입 이후 7개월 동안 월스트리트가 워싱턴의 공세에 밀렸으나 이제 힘을 내 대응해볼 수 있게 됐다”고 평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테스트의 뜻하지 않은 결과인 셈이다.

그렇다고 블랭크페인 등의 꿈이 이뤄지기는 수월하지 않을 듯하다. 미 정부가 공적자금 상환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지 않기 때문이다. 가이트너 재무장관은 “금융회사들이 세금을 빨리 상환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미 정부의 보증 없이 금융회사들이 자본을 유치할 수 있어야 공적자금 상환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했다.

짝짓기·자산매각 봇물일 듯
스트레스 테스트는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이 나라의 금융자산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는 대형 금융회사들을 합격과 불합격 두 그룹으로 나눠놓았다. “미 메이저 금융회사들이 양극화됐다”고 뉴욕 타임스(NYT)는 8일 평가했다. 골드먼삭스와 JP모건 등은 테스트를 계기로 정부의 간섭에서 탈출을 시도할 정도로 자신감을 갖고 있지만,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 금융회사들은 생존을 위해 부산하게 움직여야 한다. 특히 불합격한 금융회사들 가운데 모건스탠리를 제외한 월가의 대형 금융회사들은 상당히 버거운 규모의 자본을 유치해야 한다.

BOA 등은 테스트 결과가 발표된 직후 서둘러 자본조달 계획을 내놓았다. 339억 달러를 유치해야 하는 BOA는 보통주를 추가로 발행하고 자산을 매각하겠다고 발표했다.

웰스파고는 137억 달러를 조달해야 하는데, 일단 보통주 60억 달러를 발행한다는 계획만 내놓았다. GMAC는 보통주와 우선주를 발행한다는 원칙만 내놓았다. 아직 구체적이지는 않다. 주주들의 동요를 줄여보기 위한 전술로 비치기도 한다. 이들 금융회사는 다음 달 7일까지 필요한 자본을 어디서 어떻게 조달하겠다는 계획을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에 보고해야 한다. 돈 가뭄이 완전하게 해갈되지 않은 상황에서 수월하지 않은 일정이다.

씨티그룹은 예상보다 작은 55억 달러만을 조달하면 되는 것으로 테스트 결과 나타났다. 비크람 팬디트 씨티그룹 회장은 테스트 결과가 나온 직후 “공적자금 450억 달러를 가능한 한 빨리 상환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가 말처럼 쉽게 정부 돈을 갚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보는 사람은 드물다. 테스트 결과 씨티는 경제가 지금보다 더 나빠지면 내년 말까지 최대 1047억 달러 손해 볼 수 있는 것으로 평가됐다. 이는 전체 자산 11%에 이르는 규모다. 팬디트는 “발행한 우선주 330억 달러를 보통주로 전환해 자기자본 비율을 높이겠다”고 덧붙였다. 이는 외부에서는 단 돈 1달러도 수혈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우선주의 보통주 전환은 회계장부 계정과 계정 사이의 이동일 뿐 씨티의 체력을 높이지는 않는다”며 “이런 상황에선 씨티가 공적자금을 상환해도 다시 정부 자금을 지원받아야 할 처지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BOA 등 불합격 금융회사들이 자본을 유치하지 못하면 미 정부가 나설 수밖에 없다. 이는 월가 금융인들이 죽음만큼이나 싫어하는 정부의 간섭을 의미한다. 그래서 짝짓기 바람이 거세게 불 가능성이 엿보인다. 정부 간섭 대신 합격과 불합격 금융회사 간 결합을 통해 생존을 도모한다는 것이다. 이미 흡수될 후보군이 떠오르고 있다. 리전스파이낸셜과 선트러스트, 키코프, 피프스서드뱅코프 등 대형 지방은행이 매물로 나올 수 있다고 월가 전문가들은 내다봤다. 사모펀드(PEF)의 사냥 잔치가 열릴 가능성도 있다. 한 푼이 아쉬운 금융회사들에 현금을 쌓아두고 있는 사모펀드는 훌륭한 자금줄이다. 그 규모가 1조 달러로 추정되고 있다. 미국 사모펀드인 플렉스포드 포드의 공동 설립자인 돈 에드워즈는 8일 월스트리트 저널(WSJ)과 인터뷰서 “우리들이 은행들을 인수하는 데 걸림돌은 돈이 아니다”며 “자산과 부채를 정확하게 조사·평가할 수 있을지 여부가 중요한 변수”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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