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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오병상의 시시각각

김영선의 반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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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오병상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국회의원 한 분, 한 분은 지역과 국민의 대표입니다. 성실한 의원의 의견이 무시되는 의사진행은 안 됩니다. 우리의 생각과 철학으로 이 국회를 운영하시려 한다면 수정안을 부결시켜 주십시오.”

항명이다. 정부에서 그토록 기대하는 법안, 여당 원내대표가 발의한 수정안에 대해 같은 당 의원이 반대를 호소하고 나선 것이다. 김 위원장은 두 법안의 소관 상임위(정무위) 대표다. 정무위에서 통과시킨 원안이 아니기 때문에 부결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원안을 바꾼 수정안은 여야 원내대표들이 합의해 만들었다. 정무위에서 올린 원안이 법사위를 거치는 과정에서 이견으로 처리되지 않자 일부 규정을 고친 수정안을 만들어 곧장 본회의에 상정했다.

당연히 대부분 의원들은 그 내용을 자세히 모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까지 국회 관례로 보면 원내사령탑의 지휘에 따라 찬성표를 던지게 마련이다. 김 위원장이 그런 관행에 브레이크를 건 셈이다. 브레이크에도 불구하고 두 안건 가운데 먼저 상정된 은행법 수정안은 표결에서 통과됐다. 그러자 김 위원장이 다시 단상에 나섰다. 높은 톤의 목소리가 한층 격앙됐다.

“원내대표들이 마지막 공적을 위해 이렇게 야합하는 것은 의원은 물론 의원들이 대표하는 국민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 오늘은 여야 원내대표 권력에 의해 국회와 의원이 짓밟힌 폭거의 날입니다.”

이어 상정된 금융지주회사법 수정안은 부결됐다. 한나라당 의원 가운데 35명이 반대, 35명이 기권했다. 표결에 참여한 여당 의원 142명 가운데 약 절반인 70명이 반란에 동조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똑 같은 취지로 만들어진 쌍둥이 법안 가운데 하나는 통과되고 하나는 부결되는 코미디가 됐다. 그러나 그 과정은 매우 시사적이다.

김 위원장은 혼자 반대하지 않았다. 사전에 정무위 소속 다른 의원들과 만나 숙의했다. 다른 의원들도 모두 반대표를 던지기로 했다. 힘을 얻은 김 위원장이 두 차례나 단상에 올랐고, 결과적으로 한나라당 의원 절반을 움직여 반란에 성공했다. 기본적으로 김 위원장이 주장한 것은 의원의 독립성, 그리고 상임위 중심의 국회운영이었다. 당론이란 이름 하에 원내사령탑의 신호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거수기 역할을 거부하자는 명분이었다. 회기 막판에 몰린 원내대표의 밀어붙이기에 대한 반감도 작용했다.

야당 의원들이 당론 대신 협상을 선택한 사례도 있었다. 농림수산식품위원회는 4월 국회에서 여야 간 첨예한 쟁점이었던 농협법 개정안에 합의, 본회의 통과까지 무난히 처리함으로써 농협 개혁의 물꼬를 텄다. 당론으로만 따지자면 협상의 여지는 없었다. 하지만 의원들이 “상임위에 맡겨 달라”며 지도부를 설득, 당론의 구속을 벗어나 타협안을 만들어 냈다. 상임위 중심의 성공 사례다.

야당보다는 여당의 반란이 더 의미심장하다. 정부·대통령과의 관계까지 걸려 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 이후 대통령의 장악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정권이 바뀌었지만 대통령의 권력이 입법부로 옮겨 가는 추세엔 변함이 없다. 그렇게 되면 아무래도 대통령이 가장 불편할 수밖에 없다. 권력을 빼앗기는 느낌일 것이다. 하지만 권력의 분산은 곧 견제와 균형이다. 이미 국회의원들은 많이 달라졌다. 김영선의 반란은 그간 쌓여온 변화의 축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 대통령과 정부도 달라져야 한다.

오병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