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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경제 어려울 때마다 명동에 큰 場 섰죠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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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호 20면

기업 신용정보 회사인 ㈜인터빌 최용근(64·사진) 회장은 명동에서 사채업으로 자수성가한 인물이다. 택시 기사, 트럭 운전사, 의류 보따리 장수, 영어학원 강사에서 선풍기 제조업과 중동 트레일러 기사까지 본인 스스로 “다 기억하기조차 힘들다”고 말할 정도로 갖가지 직업을 전전하다 뒤늦게 사채업에 뛰어들었다. 1978년 우연히 길에서 만난 고교 동창에게서 ‘어음 쪽지’가 돈이 된다는 얘기를 듣고 이리저리 알아본 뒤 ‘중앙개발’이라는 상호로 사무실을 냈다. 최 회장의 사채업은 주로 기업어음 할인이었다. 개인보다 기업을 대상으로 급전을 빌려주는 사채업이다.

‘사금융 터줏대감’ 최용근 인터빌 회장

“한국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을 했던 때는 10·26 직후의 80년과 외환위기 직후인 98년 두 차례뿐이었다. 그때마다 명동엔 큰 장이 섰다. 98년에는 A급으로 분류되던 삼성전자 어음이 월 1.8%에 거래됐고 웬만한 기업은 월 4% 수준이었다(월 1.8%의 금리는 예를 들어 한 달 뒤 만기 도래하는 100억원짜리 어음을 1억8000만원의 선이자를 떼고 98억2000만원에 할인해 준다는 뜻이다. 요즘 잘나가는 삼성전자도 당시엔 연 20%가 넘는 금리로 자금을 조달했다는 의미다).”

가장 기억에 남은 금융 사건으로는 건국 이래 최대 사기극으로 불렸던 82년 ‘장영자 어음 사기 사건’을 꼽았다. “경제는 유통이다”는 유명한 말은 남겼던 장영자씨는 실제 기업에 빌려준 돈보다 더 많은 금액의 어음을 유통시키며 판돈을 키웠다. 과욕을 부렸던 사채업자들은 큰 손해를 봤지만 그는 폭풍을 피할 수 있었다. “당시 (문제 됐던) 고금리 어음을 투자자에게 직접 중개하지 않아 피해는 없었다. 금융사업이란 위험을 관리해 주는 대가로 일정 비율의 수수료를 받는 대수(大數)의 법칙이 적용되는 서비스다. 결국 리스크를 관리하는 게 중요하다. 흐르는 물을 혼자 다 먹겠다는 과욕을 부리지 말아야 한다. 엄격한 자기 절제가 필요하다.”

최 회장은 사채업을 ‘음지의 금융’으로 흘겨 보는 일부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사채시장이 제도 금융권 못지않게 산업 근대화에 상당히 기여했다는 게 그의 시각이다. “법률과 제도가 모든 산업과 사람을 다 보호하지는 않는다. 제도권에 접근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시장도 반드시 있어야 한다. 사금융은 그런 사람이나 기업을 보살피는 특수시장이다.”

그가 사채시장에서 배우고 익힌 금융의 기본 철칙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적소성대(積小成大)’. 작은 것을 모아 큰 것을 이룬다는 뜻으로 최 회장은 이것이야말로 사금융의 본질이라고 했다. 그가 만났던 백발이 성성한 사채시장의 전주(錢主)들은 한마디로 부자 티가 안 났다고 한다. “대체로 보면 속된 말로 좀 짜고 잔 사람들이 큰돈이 있다고 보면 된다.”

재테크의 원칙도 여기서 나온다. “내가 금융시장에서 배운 가장 중요한 교훈은 일확천금은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부지런히 일하면 일한 만큼 재산은 늘어난다는 게 변하지 않는 가르침이다. 우연히 이루어진 조그마한 성공에 의존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대가를 치른다.”

둘째는 순발력이다. 변화에 재빠르게 순응하는 탄력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채시장은 철저하게 자기 책임하에 수요와 공급이 이뤄지기 때문에 시대 변화에 이곳만큼 빠르게 대응하는 곳도 없다. 산업자본이 부족할 때는 도매금융을, 소비가 활개를 칠 때는 소비자금융을 주력 상품으로 내놓는 순발력을 보이는 곳이 바로 사채시장이다.”

최 회장도 순발력 있게 사채업자에서 벤처기업인으로 변신했다. 99년 인터빌을 세워 기업의 신용정보를 은행 등 금융기관에 제공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그동안 어음 중개를 해 오면서 모아 뒀던 기업 정보를 활용해 부도 위험을 분석하는 시스템을 만든 것이다. “18개 은행이 모두 우리 회사 정보를 이용하고 있다. 어음 할인 정보를 제공하니까 시장도 더 투명해졌다. 예전엔 어음을 사는 사채업자가 일방적으로 가격을 매기는 구조였지만 이제는 어음 발행 회사가 시세를 정확하게 알고 어음 발행 여부를 결정할 수 있게 됐다.”

요즘 명동 사채시장은 예전만큼 활발하지 않다. 사금융 중심지가 90년대 중반 이후 명동에서 강남으로 바뀐 데다 어음 발행도 많지 않다. “어음 발행이 줄면서 매물이 별로 안 나온다. 거래 물량이 어음 거래가 활발했던 80년대 중후반의 2% 수준이다. 명동 주변에선 한창 때 200명 이상의 사채업자가 활동했지만 지금은 20~30명이나 될까. 이들도 전성기 때 물량의 10%만 거래하고 있다.”

최 회장은 경희대 국제·경영대 객원교수를 맡아 자신의 금융 경험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국민훈장 목련장·동백장을 받았으며, 신지식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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